칼럼

[신호등]을사년(乙巳年)의 시민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김천열 동해주재 차장

곧 을사년(乙巳年) 3월1일이다. 1905년 을사년의 사정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2025년 을사년도 을씨년스럽다. 그렇기에 올해 3·1절의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3·1운동은 최초로 시민이 주도한 운동으로 의의가 있다. 특정 지도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일본의 폭압적인 식민 통치에 반감을 가진 기층민중의 운동으로 평가하는 시각이다. 이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어내려간 민족대표 33인을 3·1운동을 주도했다고 보기어려운 점도 존재한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어내려간 학생들과 고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몰려든 민중들, 3·1운동을 경험한 일부 조선의 청년들은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바꿔 한반도에서, 만주에서, 일본에서, 미국 하와이 등에서 일제와 싸우며 우리 역사의 주역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반면 태화관의 지식인 지도자 중 일부는 일제에 굴복, 친일파로 이름을 다시 올리기했다. 그래서 3·1운동하면 떠올리게 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휴교령에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운동을 벌이다 일제 헌병에 부모를 잃고 친일파에 체포,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한 유관순 열사일 듯 하다. 10대의 학생들과 10대의 학생을 자식으로 둔 부모도 거리로, 장터로 나선 가슴벅찬 순간이 우리 역사의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됐다.

또한 3·1운동은 엘리트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 시민운동임과 동시에 도시의 기층을 구성하고 있는 하층민들도 신분적인 한계를 벗어나 시민의 한사람으로 독립운동에 동참했다는 점도 의의로 꼽히고 있다. 당시 의병들도 양반과 평민이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평민이나 노비도 참여는 할 수 있었지만 인정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신분적인 한계도 결국 3·1운동을 계기로 교화의 대상이었던 민중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로 바뀌게 되었다는 평가다. 그리고 민중의 지지를 얻는 것은 향후 독립된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체계화되었다.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했으며 3·1운동에 영향을 받은 젊은 한반도의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2025년 을사년 3월1일 창간 80주년을 맞이한 강원일보사는 동해시를 비롯해 강원특별자치도의 18개 시군에서는 3·1절 106주년 기념 건강달리기 및 걷기대회를 개최한다. 제26회 시민걷기대회를 개최하는 동해에서는 지난 20일 오전 9시30분부터 사전 접수를 시작했다. 한파에도 오전 7시부터 줄을 선 70대 주민들부터 개학 전 아이들과 함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참가했다는 젊은 부부까지 참가서를 써 내려갔다. 참가자들에게 나눠줄 티셔츠 1,000장이 20일 하루만에 모두 소진되는 참여 열기를 엿보았다. 시민들의 열정에 감사한 마음 뿐이다.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하는 한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100여년 전 3월 만세를 불렀던 민중들이 세상을 바꾸었 듯 3·1절 106주년 기념 건강달리기 및 걷기대회를 함께하는 시민들도 2025년의 힘겨운 겨울을 100여년 전 열정과 희망으로 녹이길 응원한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피플&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