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을사년은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다. 또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돼 외교권을 빼앗겼던 을사늑약 1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2025년은 망국의 아픔과 희망의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의미있는 해다.
철원 노동당사 앞에는 '철원 애국선열 추모비'가 서있다. 1919년 3월10~11일 철원읍 일대에서 강원도내 최초의 3.1 만세운동이 펼쳐진다. 수백여명의 주민들이 당시 철원읍 시가지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며 독립 의지를 내비쳤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67년 지역유지와 군민들이 온정을 모아 철원중·고교 내에 추모비를 세웠다. 시간이 흘러 추모비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자 지역사회에서는 추모비 이전 목소리가 높아졌고 철원군이 호응해 2023년 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철원지역은 강원도 독립운동의 출발지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인지 독립운동사에도 굵직한 이름이 남아있다. 1903년 김화읍 읍내리(샘골)에서 태어난 '청뢰 이강훈' 선생이다.
이강훈 선생의 부친은 대한제국 당시인 1896년 김화군수로 임명돼 활동하다 을사늑약이 있던 1905년 군수자리를 내놓는다. 이강훈 선생은 1910년 아버지를 따라 현 청양리 늪골(연동)로 이주한다. 1919년 3월12일 김화지역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주재소 헌병들에게 붙잡히고 간신히 풀려난다. 부친의 민족의식에 영향을 받은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1920년 중국으로 이동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실, 신민부 등에서 활동한 그는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33년 상하이에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리카를 처단하기 위한 작전을 벌인다. 일본식 요리점인 육삼정에서 아리요시 아리카가 중국 정부 요인과 접선하다는 정보를 입수, 백정기·원심창과 함께 권총과 폭탄 등을 챙겨 작전에 돌입했지만 이는 밀정의 함정이었고 거사가 노출돼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다. 일명 '육삼정 의거'다. 이후 선생은 일제로부터 징역 1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1945년 10월 자유의 몸이 됐다. 그 해 12월 귀국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의 유해 발굴을 상의하고 1946년 3월 '3의사'의 유해를 모두 찾아 수습, 4월 귀국했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는 그 해 7월 국민장으로 서울 효창원에 모셔졌다.
이강훈 선생은 이후 광복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독립운동사를 정리하는 저술활동을 벌이다 2003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처럼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했고 '3의사'의 유해를 찾아 모셔오는 등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모순적이게도 선생의 고향인 철원지역에서는 그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 아쉽다. 지난해 이강훈기념사업회와 철원역사문화연구소, 철원군 등이 마련한 '독립운동가 이강훈 학술회의'가 처음 열려 독립운동에 매진한 청뢰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풀어냈다.
전북 정읍시에는 이강훈 선생과 함께 육삼정 의거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돼 옥중 순국한 백정기 의사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당과 기념관이 자리한다. 매년 순국 추모제도 열린다. 육삼정 의거의 주역이자 백 의사의 유해를 찾아 효창원에 모신 철원출신 이강훈 선생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