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특별기고]800㎞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30일간 내 영혼 가출사건

홍남기 전 경제부총리

산티아고 순례 프랑스길(Camino Frances)은 프랑스 생장마을(Saint-Jean Pied de Port)에서 스페인 서쪽 끝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에 이르는 800㎞ 순례걷기길이다. 매년 100여개 국가에서 45만명이 걷고 걸어 산티아고를 찾는다.

지난 7월 35도를 넘나드는 태양이 작열하는 시기에 이 산티아고 프랑스길 800㎞를 한달 간 걸었다. 정확히 30일(6월26일~7월25일)간 하루 평균 약 27㎞씩 총 818㎞, 하루 평균 약 4만5,000보씩 총 135만보를 매일 나홀로 걸었다. 단 한번의 점프(힘들어 일부 구간을 버스나 택시로 이동하는 것)없이 전 구간을 온전히 완주하겠다는 인천공항 떠날 때의 나와의 다짐을 흔들림 없이 지키면서 말이다. 30일을 걷고 걸어 마지막 날 드디어 종착지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가슴에 밀려드는 뭉클함과 ‘잘 해냈다’는 스스로의 어깨 두드림을 잊을 수가 없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대미사를 드리고 순례자협회 사무실에서 라틴어로 된 완주증을 받았을 때 지난 30일간의 고통, 소통, 경험, 추억 등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

생장을 출발했던 첫날 1,400m 피레네산맥을 10시간 넘게 오르고 내렸던 극고행의 산행걷기는 30일 순례길 중 가장 힘든 날이었는 데 이를 이겨내니 나머지 29일간 순례길은 다 이겨낼 듯싶었다. 극고행의 극복은 나 자신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귀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이후에도 190㎞에 이르는 메세타 평원의 평지를 걷는가 하면 이후 가파른 오르막과 공포의 내리막도 이어졌다. 그리고 800㎞ 순례길도 외길처럼 보이지만 6곳의 갈림길이 나와 어느 길로 걸을 지 고민 끝에 선택해야 했다. 꼭 우리네 삶의 길이 오르고 내리고 갈리고 선택하고 했던 것처럼....

30일간 하루걷기는 오전 6시부터 시작돼 보통 8~9시간을 걸은 후 오후 2~3시께 다음 숙소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하루 종일 혼자 걷고 혼자 생각하고 스치는 자연과 대화하는 것이 그렇게 행복했다. 순례길 하루하루의 유일한 목표는 “하루 잘 걷는 것”이었다. 언제 출발할지, 오늘은 몇 ㎞ 걸을지, 어느 마을·카페에서 쉴지, 어느 알베르게에서 묵을지 온전히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그동안 37년간 공직 외길을 걸으며 매일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정하고 발표하는 하루 7~8개의 일정을 숨가쁘게 소화해야만 했던 지난 삶의 트랙과 비교하면 이곳에서의 하루걷기는 나에게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시간’이었고 영혼을 더 맑게 해주는 ‘힐링과 치유 그리고 비움의 시간’이 되어 주었다.

내가 이번 산티아고 순례를 “내 영혼 30일간 가출사건”이라고 한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산티아고 프랑스길 800㎞를 걷고 나니 체중이 8㎏ 빠져 있었다. 변화는 몸무게만 줄어들게 한 것이 아니라 내 영혼에도 몇 개의 깨달음을 던져 주었다.

첫째 자신의 지난 삶의 궤적을 한번쯤 그 궤적의 밖에서 바라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한번 정도 혼자라도 도전해 보고 또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함께한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일이다. 순례자 간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신뢰와 정서공유가 깊어지는데 하물며 평생을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걸어가는 사랑하는 이들은 얼마나 소중한가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 셋째, 순례길을 나서며 13㎏의 짐을 바리바리 챙겼는데 정작 하루걷기에 필요한 물품은 5㎏이면 충분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행복은 많이 소유한 물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자일 때 찾아오는 것을 더 깨닫게 되었다. 순례후 내가 더 미니멀리스트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결과가 중요하지만 정말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닐까 싶다. 800㎞ 걸어 산티아고성당 대광장에 도착하니 진정 가장 중요한 보물은 목적지 산티아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난 30일간 차곡차곡 쌓여진 하루하루의 경험, 추억, 소통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800㎞ 산티아고 순례길을 향한 30일간의 내 영혼 가출사건은 이렇게 나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산티아고대성당 옆 순례자협회 사무실에서 라틴어로 된 2장의 완주증을 받으면서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 열심히 살다가 5년 후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시 걷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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