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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선조들의 피서법 ‘이열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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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 마저 드물던 시절 우리는 찜통 더위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아니 이 보다 더 어려운 조건. 전기를 쓸 가능성이 없는 몇 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것이 더위를 피하는 최상의 방법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왕들의 피서법은 시쳇말로 몸으로 때우는 소극적 방법이 대다수였다. 외출에는 상당한 절차가 필요했기 때문에 피서 떠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던 왕들은 궐 내에서 피서를 즐겼다. 태종의 경우 연회를 베풀거나 사신을 접대하던 누각인 경회루를 찾는 것으로 피서를 대신했다. 태종실록에서는 “경회루(慶會樓)에 가서 더위를 피하고 해가 기울어서 환궁했다(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1412년) 6월 18일)”, “경복궁으로 행차했는데, 피서때문이었다(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1413년) 6월 2일)”는 등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단종실록에는 피서할 별실을 광연루(廣延樓) 구지(舊址·옛집터)에 세웠다는 기록(단종실록 5권, 단종 1년(1452년) 1월 24일)도 있다. 성종은 가뭄이 계속되자 수라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물에 밥을 말아먹는 ‘수반(水飯)’을 올릴 것을 명한다. 하루는 신하들이 가뭄이 호전됐으니 다시 평소처럼 식사하기를 청하지만 성종은 가뭄 때문에 식사를 줄이는 것은 아니라는 답변과 함께 “낮에 수반을 올리는 것은 더운 날에 알맞은 것(성종실록 6권, 성종 1년(1470년) 7월 8일)”이라고 말한다. 현대식으로 상상력을 덧붙이면 “더운 날에는 그냥 찬물에 밥 말아 먹는게 최고야”라는 뉘앙스 아니었을까 싶다.

정조는 그냥 참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늘한 곳을 찾아 다닐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장소에 만족하고 참고 견디면 그곳이 곳 서늘한 곳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신하들에게 더울 때 책을 읽을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정조는 “올 여름에는 삼복 더위가 혹심하지만 나는 정사를 보는 여가에 책을 보는 공부를 한 번도 그만둔 적이 없다(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1799년) 6월 25일)”고 말하며 교육을 받고 있는 문신들을 향해 할 일 없으면 글을 읽거나 쓰라고 말한다. 백성들의 더위나기 방법은 다산 정약용이 1824년에 지은 한시 ‘소서팔사(消暑八事·정다산전서 中)’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소서팔사는 ‘더위를 식히기 위한 여덟가지 방법’ 을 뜻한다. 그 시 안에는 솔밭에서 활쏘기를 비롯해 △느티나무에서 그네타기 △넓은 정각에서 투호하기 △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 △연못의 연꽃 구경하기 △동쪽 숲속에서 매미소리 듣기 △비 오는 날 한시 짓기 △달밤에 개울가에서 발씻기 등이 포함돼 있다. 양반들에게만 해당됐을 것 같은 이 방법이 제대로 더위를 날려버렸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정신승리(?) 측면에서 본다면 피서가 아닌, 차라리 더위를 잊어버리는 ‘망서(忘暑)’를 택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현대로 넘어오더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변의 자연이 천연 에어컨이었다. 사진은 1971년 춘천 소양강에서 볼 수 있었던 물놀이 모습이다. 팬티도 벗어 넌지고, 말그대로 홀딱 벗은 채 강가를 달리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물 위에 둥둥 떠있는 모습들은 마치 해수욕장을 옮겨 놓은 듯 이채롭기만 하다. 블과 얼마전 까지만 해도 우리가 애용한 피서법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에서 모든것을 해결하는 아날로그적 감성 가득한 것이었다. 더위와 싸우기 보다는 받아들이기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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