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월요칼럼]열네 살 여성의 금강산 유람길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짐승이 안 되고 인간이 된 것은 다행이다. 오랑캐 땅에 태어나지 않고 문명의 나라 조선에 태어난 것도 다행이다. 그러나 남자가 되지 않고 여자가 된 것은 불행이다.” 타고난 재주와 기량을 마음껏 떨쳐보지 못한 여성의 슬픔과 고통이 느껴진다. 그러나 하늘은 산수를 즐기는 성품을 주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남자들조차 감히 엄두 내지 못한 명승지를 찾아 유람할 계획을 말씀드려 겨우 허락을 얻었다. 14살의 김금원(1817~?)은 남장을 하고 금강산 일대를 구경한 뒤 「호동서락기」를 남겼다.

금강산은 담무갈보살이 머무는 불교의 성지로 알려졌다. 보살이 머문다는 믿음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바라건대,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보고 싶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시를 지으며 동경하였다. 또한 금강산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 중의 하나로 여겼고, 빼어난 경치로 인해 앞다퉈 금강산을 유람했다. 많은 시문이 창작되고 그림이 그려졌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은 다양했다. 철원을 지나 금강산 가는 길을 생육신 남효온(1454~1492)이 걸었다. 철원의 명승인 북관정에 오른 후 김화로 향했다. 「관동별곡」을 지은 정철(1536~1593)도 이 길을 따라 금강산으로 향했다. 김화를 지나 창도역에서 금강산을 향해 동쪽으로 갔다. 일반적인 내금강 장안사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포천에서 신철원을 거쳐 김화로 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때 인근에 있는 삼부연폭포를 자연스럽게 찾곤 하였다. 진경산수화가 정선(1676~1759)은 이 길을 따라가며 그림을 그렸다.

양대박(1543~1592)은 화천 산양리를 지나 금성을 잇는 고개를 넘었다. 금성 땅 서운역에서 꼴을 먹이고 저녁에는 창도역에서 유숙하였다. 이하곤(1677~1724)은 화천 사창리에서 하우고개를 넘어 잠곡리를 거쳐 김화에 이르렀다. 안석경(1718~1774)은 산양리에서 말고개를 넘어 김화로 간 후 금성으로 향했다.

양구에서는 두타연을 지나는 길이 내금강까지 가는 최단 경로였다. 횡성에 거주하던 안석경의 「동행기」에 두타연을 지나 문등리를 거쳐 금강산 가는 길이 자세하다. 이근원(1840~1918)은 양구군 동면 임당리에서 돌산령을 넘어 해안으로 향했다. 인제군 서화면 서희리로 이동한 후, 응봉령을 넘어 속사촌에 들린 후 장안사에 도착하였다.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 가는 길은 조선 최고의 유람코스였다. 금강산뿐만 아니라 관동팔경이 곳곳에 있어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선호했다. 고성에서 해금강으로 가기도 했다. 외금강으로도 갔으며 북쪽으로 이동하여 총석정과 시중대까지 구경하기도 했다. 이 길은 김홍도(1745~?)의 그림 여행길이기도 했다.

1919년에 금강산으로 가는 철도가 착공되었다. 1924년 8월 1일에 철원과 김화 사이가 1차로 개통되고, 1931년 7월 1일에는 철원과 내금강 사이의 전체 구간이 개통됨으로써 학생들의 금강산 수학여행과 수하물 운송 등에 활용되었다. 봄·가을로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서울역에서는 직통 침대차가 운행되기도 하였다. 금강산전철 개통 100주년을 맞아 철원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로 분주하다. 용양늪 둘레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철도 일부 구간을 복원하였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자체마다 복원된 금강산 가는 길을 따라 금강산을 한 번 보고 싶다[一見金剛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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