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된 일이다. 국방의 의무를 짊어지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전역을 고작 몇 개월 앞두고 잡힌 중대급 숙영 훈련이라 불만도 많았던 만큼 기억이 나름 또렷하다. 2박3일을 밖에서 지내야 했던 당시 훈련은 부대 뒷산에 있는 일명 ‘최후 진지’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전쟁이 발발해 퇴각하게 될 경우 결사 항전을 펼쳐야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최후 진지는 꽤 높은 산에 동굴을 파 콘크리트로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한 요새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비탈길을 지나 최후 진지에 들어섰다. 적막함과 한기가 맴돌던 진지는 곧 둔탁한 군화 소리와 랜턴 불빛으로 채워졌다. 소대마다 각자 임무와 물품을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아마 사건은 그 뒤에 일어났다. 진지에서 아침인지, 점심인지 식사를 해결하고 행군에 오르기로 했다. 취사에 필요한 ‘고체 연료’ 사용 여부를 두고 간부들간 의견이 오간 뒤 결국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작대기 4개를 달고 있던 필자는 후임과 잠시 진지 밖에서 자체적(?)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지 내부에서 '으악' 비명이 들려왔다.
소리에 놀라 다시 들어간 진지는 희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좁고 폐쇄된 진지에서 여러 개의 고체 연료를 태우자 급속도로 연기가 퍼졌고, 일부 부대원들이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진지 외부로 전원 피신 명령이 떨어졌다. 몇몇 후임들은 부축을 받고 나서야 맑은 공기를 맡을 수 있었다. 혹시 모를 낙오자를 파악해야 했다. 필자를 비롯한 선임병들과 간부들이 방독면을 착용한 채 확인에 나섰다. 다행히 불상사는 없었다. 전시에 쓰기 위해 날마다 애지중지 가꿔 왔던 방독면은 안일했던 지휘 탓에 때 아닌 장소에서 뜻하지 않게 사용됐다.
가슴을 쓰리게 하는 군(軍)에서의 비보가 연신 터져나오고 있다. 지난달 말 인제에 위치한 육군 제12사단 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다 쓰러진 훈련병이 민간병원으로 이송된 지 불과 이틀 만에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훈련을 이끌었던 중대장은 완전군장 상태에서의 구보 등의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완전군장 상태에서는 걷기만 시켜야 한다는 군기훈련 규정을 거스른 명령이었다. '얼차려 사망'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이유다. 경찰은 육군으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아 중대장·부중대장 등을 업무상과실치사와 직권남용가혹행위 혐의로 정식 입건, 소환조사에 나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난해 태백의 한 육군부대에서는 혹한기 훈련을 받던 병사가 연병장 텐트 속에서 원인 모를 이유로 삶을 마감했고, 결은 다르지만 지난달 세종시에 있는 육군 제32보병사단 신병교육대에서도 훈련 중 수류탄 폭발로 훈련병 1명이 숨지기도 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다. 이 정신을 이어받은 젊은 청년들이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입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일련의 사건들로 자식의 입대를 두려워하는 부모들의 심정이 이해될 수밖에 없다. 어처구니 없는 지휘로 아찔한 순간이 벌어졌던 10년 전이야 운이 따랐지만, 요새는 그 운마저 빗나가는 것 같다. 모든 일이 지휘체계의 잘못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매번 사건사고 때마다 혁신을 강조하고 있는 군의 진정성이 결여되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