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의 질주가 눈부시다. 동계올림픽 개최로 KTX가 안마당까지 들어온 덕분에 관광객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세계합창대회도 성대하게 치러냈고 이제 동계청소년올림픽과 ITS 세계총회를 앞두고 있다. 떠들썩했던 국제영화제가 중단되는 일이 있긴 했지만 강릉은 세계적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게 됐다. 영동권에서 자란 필자 또래의 세대들에게 강릉은 예전부터 중심이었다. 수학여행 코스에 오죽헌이 들어가는 건 당연했고 단오제 시즌이 돌아오면 아주머니들은 농번기 바쁜 짬을 내 관광버스를 빌려 남대천 굿 구경을 다녀오곤 했다. 동해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강릉에나 가야 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 강릉은 문화와 교육, 관광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최근 강원특별자치도 제2청사가 강릉 주문진에 개청했다. 흥미로운 점은 특별자치도 제2청사가 왜 강릉에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이 아예 없었다는 점이다. 영동지역 6개 시·군에 태백, 정선, 영월을 포함하면 9개 지자체가 사실상 제2청사 입지 자격을 갖춘 셈인데 아무도 강릉의 입지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유치전을 벌일 법도 했건만 다들 제2도청 개청을 축하해 줄 뿐이었다. 그만큼 강릉이 영동권 중심도시라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에 일방적 관계라는 것은 없다. 관계는 상호성이다. 속되게 말하면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관계가 지속된다. 그런 의미에서 강릉의 최근 행보 중 눈에 걸리는 게 있어 펜을 들었다. 옥계항 이야기다. 옥계는 강릉 남쪽 끝에 있는 동네다. 동해와 붙어 있는 지역이라 생활권은 동해에 속한다. 시멘트 회사에서 시멘트 반출을 위해 만든 작은 항구가 옥계항인데, 연간 300만톤의 화물을 처리한다. 동해항의 5분의 1이 채 안 되는 규모다. 강릉시는 이 옥계항을 키워 보고 싶은 모양이다. 컨테이너선도 유치하고 규모도 키워 장차 국가에서 관리하는 항구로 만들겠다고 한다. 물류 전문가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치부하지만 강릉의 현재 영향력, 어쩌면 강릉 역사상 가장 강대한 정치적 권력을 생각하면 이 같은 구상이 현실화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물류단지로 개발한다고 수년을 끌어 왔던 구정지역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국가산업단지 후보로 지정된 걸 보면 강릉의 정치적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세도 과유불급이다. 정부에서 오래전부터 동해항 기능 확대를 위해 옥계항보다 5배나 큰 동해신항 조성계획 아래 방파제 등 기초 공사를 마쳐 놓았는데 이를 중단하고 옥계항에 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강원도의 뻔한 물동량을 처리하자고 동해신항도 만들고 옥계항도 키운다는 것은 더 말이 안 된다. 이런 구구한 논의에 앞서 강릉이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중심이 중심인 것은 주변이 있기 때문이다. 경포해수욕장의 소란함이 싫은 사람은 고성의 조용한 바다를 찾을 수 있어야 하고 강릉중앙시장의 번화함이 싫은 사람은 삼척중앙시장의 푸근한 인심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주변이 주변대로 살아야 중심이 빛나는 법이다. 백번 양보해 강릉에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돼 수출입 물량이 쏟아진다고 하자. 고작 20㎞밖에 떨어지지 않은 동해항을 이용하면 뭐가 문제인가. 강릉도 살고 그 덕에 동해도 살면 뭐가 문제란 말인가.
강릉은 춘천 등에 비해 소외돼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인구가 줄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강릉을 중심이라 생각하는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길 바란다. 강릉이 갖고 있는 전통과 품위가 값싼 지역이기주의의 도구가 아니라 존중과 존경의 대상으로 남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