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착함=무능함, 관대함=악덕…시대 따라 변하는 사회현상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장애인 대신 '장애우'바꿔도

의식변화 없인 사회 안 바뀌어

시대 흐름 포착한 뛰어난 작가

당대의 평가어 재정의하기도

아마도 '어벤져스:엔드게임'보다 더 훌륭한 영화 '미성년'은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이다. 미성년에서 남편은 오리고기 식당을 하는 여자와 바람이 나고, 남편의 외도를 알아차린 아내는 날카롭게 따져 묻는다. “성욕이야? 사랑이야?” 남편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는 성욕과 사랑을 구분하지 않기에 아내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 흑심, 의무감, 성욕 등 인접 단어를 적절히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이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냐고? 사용한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 아니겠냐고?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종종 사랑, 인권, 유교, 신자유주의, 4차 산업혁명, 민주주의, 창조경제 등의 단어들을 입에 올리지만 정말 뜻을 알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누군가 진지하게 말한다. “저 사람의 인권을 인정해야 할까요?” 인권이라는 것이 인간이라면 누리게 돼 있는 보편적 권리라는 걸 안다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따라서 저 말은 인권에 대해 말해주기보다는 그가 인권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말해준다. 아이가 진지하게 요구한다. “우리 엄마 아빠가 섹스한 적이 있는지 증거를 대봐요!” 부모가 섹스를 했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났다는 걸 안다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따라서 아이의 요구는 섹스에 대해 말해주기보다는 그 아이가 섹스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말해준다.

사랑이란 단어 쓴다고 아는건 아냐

어떤 단어는 그저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이유로 사용되기도 한다. 음, 저기 걸어오는 저 사람이 왠지 우울해 보이는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일단 “사랑한다”는 말을 던져볼까. 음,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해 일단 칼럼에 “창조 경제”라는 단어를 써볼까. 음, 요즘 유행하는 단어라니 일단 제안서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를 써볼까. 음, 사람들이 열광하는 단어이니 성명서에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넣어볼까. 다수가 공분하는 단어이니 “신자유주의”라는 라벨을 붙여볼까. 그런 식으로 사용될 때, 그 단어는 “멍멍!”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라리 특정 단어를 집요하게 기피하는 사람이 그 단어 뜻을 더 잘 알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어떤 부부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 간에 해 본 적이 없다. 사랑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고귀한 뜻을 감안할 때 감히 부부간에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상호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며 위기를 미봉하는 이들보다는 이 부부가 사랑이라는 말뜻을 더 정확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용되는 단어, 남용되는 단어, 모호한 단어, 다양한 용례가 있는 단어일수록 신중한 사람들은 해당 단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그 단어를 가능한 한 정확히 정의하고자 든다.

말뜻을 판별하는 일은 한 줄 문장을 쓰는 일을 넘어서, 큰 사회적인 함의가 있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할 줄 모르면서 다양성이 넘치는 혹은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다른 의견을 모두 틀린 의견으로 몰아세울 텐데? 혹은, 틀린 의견을 다른 의견이라고 변명할 텐데? IQ, 영리함, 지혜, 슬기, 지성 등을 구분할 줄 모르면서 바람직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을까? 대학입시에 성공했다고 자신을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착각하거나,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믿거나, 현자라고 자처하는 사태가 일어날 텐데?

그렇다고 해서 구분이 다 능사라는 말은 아니다. 어떤 구분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과 같은 인종 구분은 서구 제국주의의 전개와 더불어 정착되었다. 나는 황인종으로 분류되지만, 내 뽀얀 우윳빛 속살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황인종이라는 '사실'을 의심한다. 인종 구분과 같은 것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구분이 단지 현상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현상을 평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노예라는 말을 생각해보라. '노예'라는 단어는 단지 특정 현상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가하는 역할까지 한다. 그러기에, 조선 시대 노비를 노예로 부를 것인가, 위안부를 성노예로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치적인 이슈이기도 하다.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가 말했듯이 평가어는 해당 사회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러기에 어떤 단어에 단순히 변화를 준다고 해서 해당 사회가 곧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의식을 개선하기 위해 장애인이라는 말 대신 '장애우'라는 말을 택한다고 해서 관련된 사회의식이 자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명실상부한 사회의식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장애우라는 신조어는 오히려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스트레스만 줄 수도 있다. 친구로 대하지도 않으면서 왜 친구라고 부르는 거야! 문명인처럼 군답시고 먼 나라 원주민을 야만인 대신 야만우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일 것이다.

단어를 둘러싼 제반 조건이 바뀐다면 단어 자체가 바뀌지 않아도 그 단어의 함의는 바뀔 수 있다. 김광석이 불러 유명해진 노래 '서른 즈음에'를 예로 들어보자.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와 같은 가사를 생각해 볼 때 이 노래는 명백히 서른을 청춘의 종말쯤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노래도 마찬가지다.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라는 가사를 보라. 마치 늙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처럼 서른을 노화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이 발표한 새로운 연령 구분 지침에 따르면 이제 18세에서 65세까지가 청년기다. '서른'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30세라는 기본 뜻은 바뀌지 않았지만, 서른이라는 말의 함의는 이제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예상 수명이 현격하게 바뀌면서 비로소 가능해진 변화다.

수명의 획기적인 연장에 필적할 만한 역사적 조건의 변화로는 자본주의의 등장을 들 수 있다. 대규모 상업의 발달, 그리고 뒤이은 자본주의의 발흥은 실로 인류사의 거대한 변화 중 하나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상인들은 기존에 종종 탐욕스럽고 부정직한 패거리로 인식되어온 자신들의 이미지를 바꾸고, 자신들의 이윤추구 활동을 정당화하기 원했다. 그리하여 그에 공명하는 지식인들은 기존의 평가어들의 함의를 바꾸고자 부심했다. 그 과정에서 검소(Frugality), 야심(Ambition), 약삭빠름(Shrewdness)과 같은 용어의 함의가 바뀌었다.

착하다=미모·재력없다는 뜻 쓰여

역사가들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 자본주의의 발흥에 정말 중요한 원인이 됐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적어도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유용한 평가어들을 제공하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 그러한 평가어의 변화는 자본주의의 발흥이라는 큰 사회적 변화와 함께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퀜틴 스키너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규범적인 평가어들의 쓰임새에 의해 지탱되므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한 방법은 그 평가어의 적용방식을 바꾸는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한 바 있다. 실로 뛰어난 작가는 시대의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해 당대의 평가어를 재정의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한때 미덕으로 높이 평가되던 관대함(Liberality)이 사실 악덕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한국 사회의 경우 '착함'은 한때 높이 평가되던 미덕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사회 일각에서는 '착하다'는 말이 미모, 재력, 지성, 학식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리하여 결국 내어놓을 것이 모나지 않은 성격뿐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곤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세가 가속화되면 누가 소개팅에서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겠는가. 착함이 곧 무능함의 동의어로 돼가는 현상, 이것은 한국 사회가 흘러가는 어떤 방향을 지시하는 것일까.

김영민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영문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고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강원일보사와 중앙SUNDAY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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