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성숙 교회음악박사 : 한서 선생이 작사·작곡한 음악에 나타난 민족정신
한서 남궁억이 남긴 대표적인 노래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가다. 1928년 찬송가집에 수록된 이 노래는 한서의 나라사랑 마음이 그래로 묻어난다.
애국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일제가 금지곡으로 규정했고 제1호 금지 찬송가가 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한서 선생의 기질이 발휘된 놀이 동요다. 한서 선생이 노래를 통해 주는 메시지는 '사랑'이다.
한서는 조선을 사랑했고, 백성을 사랑했으며, 조선의 산과 강, 하늘을 사랑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독립'이라는 선물을 줬다.
△박용규 상지대 교수 : 강원언론 탄생의 주춧돌이 된 남궁태, 김우종
일제강점기에 전국 13개 도 가운데 신문이 발생되지 않은 지역은 강원도와 충북뿐이었다. 강원도는 광복 이후 신문이 발행됐고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이 주도했다.
강원일보 초대 사장인 김우종과 강원일보 전신인 팽오통신 창간을 주도한 남궁태 모두 홍천군 서면 출신으로 남궁억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 옥고까지 치렀으며 광복 이후 민족주의자로 통일·민주·자주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두 사람의 언론적 지향과 활동은 그대로 강원일보를 통해 나타났다.
△전상국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민족주의자이며 이성의 큰 정치가 김규식
우사 김규식은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에 합병되자 독립을 위해 망명길에 올랐고 광복 후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으로 신국가 건설에 힘썼다. 광복 직후 김구와 함께 자주적 통일국가 수립에 앞장섰다.
남북 양쪽에서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한만의 5·10 총선거에 '불반대·불참가' 성명을 발표했다. 평양 인근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는데, 남한과 북한 모두 그를 기린다. 김규식 학회도 운영된다. 김규식을 홍천 사람으로 내세울 만하다.
△유성선 강원한국학연구원장 : 전란 속 팔만대장경 판각을 지휘한 용득의
용득의의 키워드는 홍천 용씨 시조, 팔만대장경, 금학산, 학서루로 압축된다.
1236년 고려 고종 23년부터 16년간 1차 몽골의 난 당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소실된 것을 고려 문하시중으로 30년간 판각을 지휘했다. 만년에 홍천에 내려와 금학산에 용수사를 세우고 학서루를 창건해 불교 전파와 경서를 가르쳤다.
홍천 용씨는 홍천 땅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지금도 사당이 있는 동면과 인접한 여러 마을에 집성촌이 있다. 용득의의 생평과 학행을 통한 인문학 콘텐츠 및 아카이브 구축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