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 갈 때 갑자기 비가 내렸다. 임금을 비롯해 신하들은 비를 피하느라고 황급히 뛰어갔다. 그런데 백사(白沙) 이항복만은 오는 비를 흠뻑 맞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옆에서 까닭을 묻자 이항복이 말했다. “뛰어가면 앞에서 내리는 비까지 죄다 맞습니다. 천천히 걸어야 비를 덜 맞지요.” 기발한 대답에 임금과 신하들은 오랜만에 배를 잡고 웃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 비가 내리면 젖는 것은 과연 몸뿐일까. “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마음에는 눈물이 내린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이 슬픔은 무얼까/ 대지 위에, 지붕 위에/ 나지막한 빗소리/ 울적한 가슴에 고이는/ 아, 비의 울음소리여!” 프랑스의 시인 폴 베를렌의 시다. ▼장맛비가 간단없이 전국을 두드리고 있다. 도 전역에 이틀간 최고 300㎜가 넘는 물 폭탄이 떨어지면서 각종 피해가 잇따랐다. 특히 지난 4일 밤 하천에 추락한 승용차에 탔던 노인 4명이 실종됐다. “말 안 듣던/ 지상의 청개구리들/ 갹갹갹갹/ 잘못했노라고 일제히 울어대더니/ 괜찮다, 괜찮다/ 와락 품어 안으며/ 하늘에 계신 어머니들 모두 눈물 흘리신다.” 양전형 시인의 '장마'가 오늘따라 절절히 가슴을 파고든다. ▼대만과 중국 남동지역으로 향하던 제1호 태풍 '네파탁'이 진로를 바꿔 우리나라로 직접 올라올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기상청은 중국 내륙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됐던 네파탁이 8일 급격히 우리나라 서해안으로 진로를 바꿀 것으로 예보했다. 주말 비바람이 예상된다는 또 우울한 소식…. 장맛비야 우산으로 해결한다지만 실종된 노인들로 납덩이가 된 가슴속의 저 비는 무슨 수로 해결할 것인가. 가도 가도 끝없는 인생의 빗줄기는 또 무엇으로 막아야 하나. 걷든지 뛰든지 가슴속의 비는 피할 길이 없다.
권혁순논설실장·hsgweon@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