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중언

[언중언]기부의 의미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때다.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 칼레를 함락시킨 영국군은 저항했던 시민 대표에게 자비를 베푸는 대가로 여섯 명의 목숨을 요구했다. 가장 부유했던 시민 외스타슈 생 피에르가 희생양을 자처했다. 감명한 시민들이 따라나서 자원자가 일곱 명이 됐다. 이에 다음 날 장터에 가장 늦게 나오는 사람이 빠지기로 했는데 생 피에르가 안 보였다. 대신 나온 아버지가 아들 생 피에르의 죽음을 전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머지 시민을 살린 것이다.

▼'특권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가 이 '칼레의 시민들'이다. 진정성이다. 칸트의 '윤리학'에 의하면 도덕적 행위는 무조건적인 의무의 수행이며 어떤 조건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사심 없는 순수함을 의미한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2,000년 역사를 지탱한 힘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철학'에 있었다고 했다. 평상시에는 호사를 누리지만 전쟁 등의 위기가 닥치면 선두에 서서 군대를 이끌었다.

▼우리네 선조도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솔선해서 베풀었으니 '선비정신'이다. 경주 최 부자 집의 가훈이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 섬 이상 모으지 마라. 셋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마라. 다섯째,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정직하게 돈을 벌어 가능한 남을 위해 써야 한다.” 기부의 대명사 록펠러(J.D Rockefeller)의 말이다. 칸트의 주장대로 문제는 도덕성이다. 몇 해 전 우리의 재벌가들이 8,000억 원, 1조 원을 내놓고도 순수성 결핍으로 칭송받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331억여 원의 사재를 내놓아 장학사업을 펼치는 재단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감동이 반감돼 아쉽다. 지난 선거 때 언급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나눔과 기부의 문화가 촉진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정치색을 배제시켰다는 말로 듣는다.

용호선논설위원·yonghs@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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