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월드컵의 추억은 하나쯤 있다. 2002년 여름, 기자에겐 너무 어린 시절이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그날의 열기는 지금도 한국 축구의 공용어처럼 전해진다. 거리마다 붉은 물결이 넘쳤고 골이 터질 때마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얼싸안았다고 한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첫 원정 16강, 2018년 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2022년 카타르월드컵 포르투갈전 극장골도 그랬다.
월드컵은 그런 무대다. 직접 겪은 세대에게는 평생의 기억으로, 뒤늦게 전해 들은 세대에게도 하나의 신화로 남는다. 선수에게는 평생의 목표이자, 한 나라에는 오래도록 되새겨질 자긍심이다.
가레스 베일의 일화도 이를 잘 보여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수 차례 유럽 정상에 올랐던 그는 조국 웨일스를 64년 만의 월드컵 본선으로 이끈 뒤 벅찬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선수에게도 월드컵은 한 소년의 꿈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월드컵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세계적인 스타들도 끝내 트로피를 들지 못한 채 은퇴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강국도 예선에서 무너진다. 4년에 한 번 열린다는 시간의 간격은 선수에게 더 가혹하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을 앞둔 대한민국의 온도는 이상하리만큼 낮다. 개막이 코앞인데도 거리의 들뜬 공기는 예전 같지 않다. 대표팀 명단을 놓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열기, 첫 경기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던 설렘도 희미하다.
이러한 현상이 단순히 성적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서 강팀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족함을 알면서도 응원했고, 강팀을 만나도 버티고 또 버티는 모습을 기대했다. 국민들은 완벽한 팀만 사랑한 적 없다. 다만 납득할 수 있는 팀, 끝까지 뛰는 팀, 태극마크의 가치를 아는 팀을 보고 싶어 했다.
지금의 냉랭한 분위기는 그 기대가 식어서가 아니라 신뢰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대한축구협회를 향한 불신은 오래 쌓였다. 감독 선임 과정에서 드러난 혼선,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 책임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구조가 반복되면서 팬들의 피로감은 커졌다. 특히 홍명보 감독 선임 절차를 둘러싼 논란은 대표팀을 향한 국민적 신뢰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월드컵 이후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것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오랜 시간 쌓인 불신은 끝내 월드컵 직전까지 대표팀을 따라붙었다. 협회는 대표팀을 뒷받침해야 할 조직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대표팀이 협회의 불신까지 짊어진 형국이다. 선수들이 뛰기도 전에 행정이 먼저 국민의 마음을 지치게 만든 셈이다.
오늘 오전 11시, 한국 축구는 체코를 상대로 월드컵의 첫 문을 연다. 체코전은 차갑게 식은 여론 앞에서 홍명보호가 처음으로 제출하는 답안지일 것이다.
특히 우리에게 이번 월드컵은 더욱 소중한 마지막 장면일 수 있다. 네 번째 월드컵, 그리고 어쩌면 전설의 마지막 월드컵. 손흥민에게도, 그를 지켜본 한국 축구팬에게도 이번 월드컵은 쉽게 흘려보낼 수 없는 무대다.
홍명보 감독은 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며 “나는 나를 버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말의 무게를 본인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2014년의 치욕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감독은 과정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이미 과정은 오답임을 보여줬다.
파부침주(破釜沈舟), 배수진은 쳐졌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홍명보호는 이제 그라운드 위에서 결과로 답해야 한다.
이동수기자 messi@kw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