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한국의 지성계에 돌연 활기가 돌았다. 탁석산의 책, ‘한국의 정체성’이 일으킨 소란 때문이었다. 탁석산은 한복, 유교문화 등이 현대 한국인의 삶을 얼마나 규정하고 있는지 묻고, 오히려 자본주의, 민주주의, 서구적 라이프 스타일이 한국인을 설명하기에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과거에 확립된 고유한 무엇인가가 정체성이라고 생각되고 있었으므로, 소란이 없을 수 없었다. 26년 전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체성을 고정되고 불변하는 무엇인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정된 과거의 무엇인가가 정체성의 핵심이라면 K-pop은 한국문화일 수 없을 것이다.
1867년 기본 규칙이 제정되면서 복싱의 틀이 잡혔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복싱 스타일이 생겨났다. 몇몇 복싱 강국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는 복서의 움직임만으로도 그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훅, 어퍼, 더킹 등 기본 기술은 같지만, 기술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총체적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총체적 스타일이야말로 특정 문화를 대표한다. 예를 들어, K-pop을 구성하는 요소가 모두 서구에서 왔다 하더라도 고유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총체적 스타일 때문이다.
정체성은 역동적 개념이라는 탁석산의 견해에 스타일을 더해보자. 문화정체성은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스타일이고, 한복이나 한옥은 그런 스타일에서 나온 문화적 산물이다. 문화적 산물보다는 다양한 문화적 산물의 배경을 이루는 스타일이 정체성의 핵을 이룬다. 정체성의 핵을 이루는 스타일은 과거에서 찾아지기보다는 미래적으로 구현되며,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기보다는 저절로 형성된다. 간단한 인사와 같은 일상적 상호작용을 통해, 품 안의 아이를 보는 엄마의 행복한 미소를 통해 문화가 형성된다.
인공지능 기술 경쟁이 뜨겁다. 대부분은 제미나이 같은 미국의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 지적으로 종속될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LLM을 이용하면서도 자신의 DB와 소버린 LLM을 유지하는 유일한 국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지식의 연원을 타국에 의존하는 운명은 끔찍하다. 일상의 상당한 시간을 LLM과 혹은 작은 언어 모델(SLM)을 내장한 휴머노이드와 상호작용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LLM이 중국의 것이라면 사용자들은 중국인의 정체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소버린 AI가 필요한 근본적 이유이고 데이터 주권이 강조되는 배경이다.
데이터 주권개념은 지방정부에도 적용된다. 편향된 학습을 한 소버린 AI는 ‘강원도 누정의 특성을 알려줘’라는 질문에, 영남권 누정의 이미지를 소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치 않은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소버린 AI가 강원도에 관한 질문에 답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아카이브가 필요한데, 그 아카이브에는 가능한 한 확보할 수 있는 강원도의 거의 모든 민간기록자료를 탑재함으로써 데이터의 전략적 가치를 고도화해야 한다.
율곡국학진흥원의 ‘한국학 아카이브’가 일상적 궁금증이나 ‘이 지역에 식당을 개업하려 해, 과거 이 지역에 어떤 식당이 잘되었는지 알려줘’ 같은 의사 결정의 근거로 이용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지역의 광대한 자료를 탑재한 스마트 아카이브는 지역의 정체성 강화에 기여할 것이고, 강화된 정체성은 문화를 풍요롭게 할 것이며, 풍요로워진 문화는 수준 높은 관광상품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패러다임이 전환된다는 것은 다양한 영역이 새롭게 연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에 기반한 스마트 아카이브와 관광상품도 그런 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