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대중매체 속 실록이야기 ⑩영화 ‘왕과 사는 남자’(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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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3년(1457년) 6월,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유배지인 영월로 떠난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를 매우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노산군(魯山君)이 영월로 떠나 가니, 임금이 환관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했다.(세조실록8권, 세조 3년 6월 22일)” 단종은 자신을 배웅하러 온 안노에게 “성삼문의 역모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라며 체념 섞인 자책을 남겼다.

단종이 영월로 내려간 사이, 순흥에 유배돼 있던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1426~1457·이유)은 또 다른 반전을 꾀하고 있었다. 그는 순흥 부사 이보흠과 결탁해 영천과 안동의 군사를 모아 단종을 복위시킨다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데, 내가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세조실록8권, 세조 3년 7월 3일)”라며 안동에 있는 자신의 가동들까지 합세해 병사를 모으려 했다. 하지만 이보흠이 금성대군의 역모를 고발하면서 두 번째 복위 운동은 허망하게 끝나게 된다.

이 사건은 단종의 죽음을 재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양녕대군과 영의정 정인지 등 벼슬아치들은 “노산군이 종사에 죄를 지었고, 금성대군이 불궤를 도모했다”며 끊임없이 이들의 처단을 주청했다. 결국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리고 관련자들을 처벌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때의 상황을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세조실록9권, 세조 3년 10월 21일)”고 짧고 건조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대기록(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죽음을 후대의 기록(숙종실록·숙종실록33권, 숙종 25년 1월 2일)이나 야사에서 가져오고 있다. 특히 야사는 단종의 최후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제4권·단종조고사본말)’에 따르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영월에 도착했지만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엎드려 울기만 했다고 했다. 이때 항상 단종을 모시던 한 통인(공생)이 자청해 단종이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활줄을 걸어 당겨 목을 졸랐다는 것이다. 17세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목을 조른 통인은 아홉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즉사했고, 맹렬한 폭풍우가 몰아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시녀와 시종들 역시 영월 동강에 몸을 던져 둥둥 뜬 시체가 강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은 훗날 전설로까지 이어졌다. ‘금계필담’에는 단종 승하 후 부임하는 영월 부사들이 연이어 급사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고 전한다. 담력 있는 한 신임 부사가 부임 첫날 밤, 곤룡포를 입은 단종의 혼령을 만나게 된다. 혼령은 “아직도 그 활줄이 내 목에 매어져 있으니 아픔을 참을 수 없다”라며 고통을 호소했다. 이에 부사는 과거 호장이었던 엄흥도를 불러내어, 동강에 버려진 뒤 남몰래 모셔두었던 단종의 옥체를 찾아갔다. 실제로 관을 열어보니 단종의 목에 활줄이 그대로 감겨있었고, 부사가 즉시 이를 풀고 예를 갖춰 장사지낸 것이 오늘날의 장릉(莊陵)이라는 것이다. 정사와 야사 중 어느 것이 완전한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7세 소년 왕이 권력의 비정한 암투 속에서 맞이해야 했던 죽음이, 조선 역사상 가장 시리고 애통한 장면이라는 사실만큼은 역사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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