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청봉]예산전쟁의 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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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 정치부 부장

“장관님, 개혁은 늘 중요합니다. 다만 이번 연도 예산은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개혁은 내년에 검토하되 그때도 예산 사정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1980년 영국 BBC에서 방영된 정치 풍자 시트콤 예스 민스터(Yes, Minister)에 등장하는 대사다. 현실 정치의 작동 원리, 예산의 중요성 등을 다룬 정치 코미디의 명작으로 꼽힌다. 이 대사는 예산을 핑계로 개혁을 미루는 관료제의 복지부동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등장하지만 그만큼 현실 정치에서 예산 편성에 대한 권한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는 지 여실히 보여준다.

어김없이 연말 예산전쟁이 시작됐다. 정부는 국회에, 강원특별자치도는 도의회에 각각 내년 예산안을 제출했다.

예산안 심의는 헌법이 정한 의회의 가장 핵심적인 권능이자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운영의 기초 설계도이다. 특히 올해는 이재명 정부가 짠 첫 예산안이자 민선 8기 강원도정. 18개 시·군정의 마지막 예산안이며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까지 맞물려 어느 때보다 주목도가 높다.

나라의 재원은 한정돼있고 정부, 여야, 광역지자체 등 여러 이해가 얽힌 집단들이 생각하는 예산편성의 우선순위는 저마다 모두 다르다. 엑셀 시트에 찍힌 글자 하나, 숫자 하나에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고배를 마실 수 밖에 없다. 특히 예년의 예산전이 물밑에서 진행되는 치열한 정보탐색전이라면 선거를 앞둔 올해는 격렬한 쟁탈전을 예고하고 있다.

예산전쟁은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자연스런 일이자 참전하는 각 주체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주장과 요구를 어필하며 돋보일 수 있는 대형 정치이벤트이다. 다만 참전 주체들의 입장이 다르고 힘의 차이도 달라 충돌이 불가피하게 벌어진다. 행정부의 정치는 균형과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하고, 국회와 지자체 등의 정치는 현장의 목소리를 예산안에 담아 현실화해야 한다. 서로의 정당한 가치판단이 충돌하는 당연한 일이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쪽지 예산도 상황에 따라 나름의 효용성과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정치의 본령인 예산전쟁에 대해 국민들이 피로를 느끼고, 거부감을 갖는 것은 정당한 가치와 명분의 충돌이 아닌 ‘힘의 논리’에 따른 일종의 거래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산은 누구나 동등하게 낸 세금이 모여 만들어지지만 권력의 요구만이 공론화되고, 인구와 표가 적은 지역이나 힘이 없는 집단의 요구는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강원특별자치도는 내년 사상 최초로 국비 10조원 시대를 열며 국비 확보 목표를 조기에 달성했다. 또 내년 도 예산안 역시 사상 처음으로 8조원을 넘어서며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강원자치도는 민선 8기 도정 출범 이후 재정건전화와 긴축재정을 강조해왔으나 임기 후반부에 접어들며 씀씀이가 커졌다. 이재명 정부 역시 지난 정부의 긴축에서 탈피해 확장 재정 정책을 펴고 있는데다 지방재정을 지금의 3배 가량 확충하겠다고 공언해 내년 국비 증액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확장적 재정 정책은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지만 엉뚱한 곳에 쓰인다면 미래세대의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확장 재정이 부작용 없이 큰 성과를 내려면 늘어난 예산을 힘의 논리가 아닌 반드시 필요한 지역과 사업에 적재적소 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전국 시·도지사가 모인 중앙지방협력회의에서 “지방 재정분권을 확대하겠다…수도권서 멀수록 예산을 더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내년 예산 편성의 중요한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에는 아직도 고속도로가 없고 철도도 없는 곳이 여러 곳이다. 올해 예산 전쟁은 무늬만 확장 재정이 아닌 진짜 필요한 곳에 돈이 쓰이는 결과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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