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지면 위 본문 한 글자는 이른바 '중앙지'로 불리는 신문들보다 1㎜ 가량 크다. 1㎜는 많은 일을 한다. 눈이 침침하다는 순이 할머니에게 내년 지방선거 후보자 정보를 알리는 일, 최근 기침이 심해졌다는 영길 할아버지에게 진폐환자 지원 의료기관이 확대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일, 그리고 수확철 농기계임대사무소가 연장 운영한다는 소식을 공지하는 일 모두 1㎜가 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1㎜로는 부족한 일도 있다. 글자보다는 입말이 주된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되는 지역도 농어촌에는 상당수 존재한다. 신문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가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문의 정보, 그리고 글을 통해 전해지는 '지식'이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다.
젠더화된 억압과 불평등에 함께 맞서자는 지식과 실천, 페미니즘이 다시 미디어를 통해 한국 공론장의 수면 위로 떠오른지 올해로 10년이 됐다. 일명 '페미니즘 리부트 10주년'이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혜화역 시위.' 페미니즘을 다시 한국 사회의 중심으로 올린 장소는 분명 서울이었다. 순이 할머니가 사는 화천 사창리에서는 약 130㎞, 영길 할아버지가 사는 강릉 옥계에서는 약 230㎞. 1㎜보다는 분명히 먼 거리지만 이 지식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농·어촌 소수자들의 삶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가뭄이 강릉을 덮치던 지난 9월, 제한 급수 상황 속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맞이한 사람은 한국어가 서투른 이주 여성들이었다. 출산 당시에도 '미등록' 신분이라며 제대로 된 도움도 받지 못했다는, 그리고 가뭄 상황에서 아기 분유를 탈 생수 지원조차 오래도록 받지 못했다는 토로는 그 자체로 젠더화된 불평등이 지역과 교차하는 방식을 짚어냈다. 인종과 결부된 불평등, 여전히 보장되지 않는 여성의 재생산 권리, 페미니즘이 오래 고민해온 의제가 어떻게 지역 사람들의 안녕에 기여해야 할지, 고민을 던지는 지점이다. 코로나19 당시에는 또 어땠나. 등교 중지와 농번기가 번갈아 겹친 상황 속, 여성 청소년이 가정의 돌봄노동을 대신하느라 등교 개학시에도 학교에 가지 않길 강요받는 사례도 있었다. 한국의 페미니즘이 서울 학술장 '지식'을 넘어 이제는 사람들의 지식, 무엇보다 경계를 넘는 실천으로 빚어지길 다시 한번 바라게 되는 이유다.
서울에서 130㎞, 그리고 230㎞. 순이 할머니와 영길 할아버지의 관점에서 페미니즘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하루바삐 흘러가는, 능력주의적인 한국 사회에서 노인으로 살기, 그리고 농촌에서 여성으로 살기, 혹은 가부장제 속에서 '남자다울' 것을 강요받기. 서울만 말고, 중산층과 지식인만 말고, 우리 모두를 해방하는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지점은 지역과의 교차점 안에 이미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아픈 몸과 주민들이 놓인 환경 속에서 1㎜ 더 큰 글씨가 사람의 앎이 되듯, 사람들이 선 자리, 그 정치적 위치가 놓인 지점에서 페미니즘의 실천도 한 발 앞서 한국사회가 따라오길 기다리고 있다. 계급과 지역을 이미 넘은 페미니즘이 '지식'보다 먼저 주민의 삶 속에 있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