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빛은 번지며 사유의 결을 남기고, 여백은 비워지며 시간을 머물게 한다.”
춘천에서 활동하는 문인화가 정지인의 개인전 ‘호수에 퍼지는 먹의 향기’가 오는 27일까지 춘천 갤러리 풀문(FULL MOON)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시간성’과 ‘정적의 미학’이라는 철학 속에서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문인화 세계의 깊이를 고요히 풀어낸다. 전통 수묵 기법 위에 실험적 재료와 구성이 더해져 먹이 담아내는 ‘사유의 농담’이 각 작품마다 다르게 펼쳐진다.

‘호수에 내리는 비’는 화면을 가득 채운 사선의 빗줄기가 먹의 농담으로 시간을 그려내고, 전경의 갈대는 휘몰아치는 바람의 감각을 붓끝에 실어낸다. 먹의 번짐은 감정의 흐름을 상징하고, 갈대와 배, 그리고 초가는 세상으로부터 한 발 물러선 존재의 태도를 암시하는 듯 하다. 곧고 단정한 먹의 선으로 죽간(竹竿)을 그린 작품은 마치 스스로를 지탱하는 정신처럼 화면을 곧게 관통하고, 가지마다 퍼진 잎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는 고요한 힘을 보여준다. 그림 옆에 함께 적힌 시구는 자연을 품은 화폭 위에 인간의 내면과 시대의 정서를 아로새긴다. 매화와 보름달을 화면에 등장시킨 또다른 작품은 전통 회화의 상징적 모티프를 통해 계절과 감정을 함께 담아낸 수묵채색화로 먹선의 절제와 노란 채색의 과감함이 조화를 이루며, 화면 전체가 한 편의 시처럼 구성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처럼 정지인은 전통적인 문인화의 필법을 유지하면서도, 그 경계 안에 현대적인 감각을 이식하는 독창적 화법으로, 수묵 특유의 ‘스며듦’과 ‘퍼짐’으로 시적인 리듬을 만들어 내며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