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사재판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고, 피고인이 유죄일 경우 형벌을 부과하게 되는 절차여서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무죄 판단을 그르쳐 무고한 피고인이 생기면, 피고인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진범을 놓친 셈이 되니 형사재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형사재판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셨고, 범죄 중에 가장 중한 범죄인 살인 사건을 처리할 때는 더욱 신중을 기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 관할 고을의 수령이 초검(初檢)을 하고, 인접 고을의 수령이 복검(覆檢)을 하였습니다. 초검과 복검을 하는 과정에서 초검을 담당한 수령은 자신이 검시한 내용을 복검을 하는 수령에게 누설하지 못하도록 벌칙이 규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초검과 복검을 마치면 상급 지방관에게 그 결과를 제출하는데,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할 때는 그 내용으로 사건을 결정하였으나,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의견에 의문이 있는 경우에는 다시 검시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다시 검시를 하게 되는 경우에는 중앙의 형조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검시하고,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관리를 보내 검시한 다음, 초검과 복검 결과를 참작하여 최종 결론을 내리게 되나 사건에 따라서는 검시를 대여섯번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검시를 할 때에는 무원록(無寃錄)이라는 책을 참고하였다고 합니다. 무원록은 검시에 관한 법규와 판례, 상처와 사인(死因)들이 열거되어 있는 일종의 법의학서입니다. 무원록에는 앞면과 뒷면을 합쳐 70여 항목에 걸쳐 시신의 상태를 기술하도록 되어 있는 등 매우 구체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에서 편찬된 책인데, 조선 세종대에 무원록을 주해한 신주무원록(新註無冤錄)이 간행되었고, 영조대부터 신주무원록의 내용을 증보하고 해석을 붙이는 작업이 시작되어 정조대에 한글로 주석을 단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이 편찬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현재와 비교하면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한계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사건을 진행하는 절차를 마련하고, 관련 서적을 편찬하고 개정하는 등 사건을 신중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려는 선조들의 노력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다산 정약용은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을 위하여 형벌 규정의 기본 원리, 중국과 조선의 판례와 자신이 실제 처리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건을 정리하고 이에 대한 분석 및 논편을 모아 흠흠신서(欽欽新書)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흠흠(欽欽)’이란 ‘매사에 삼가고 또 삼갈 일이다’라는 의미라고 하며, 정약용은 재판의 정밀하고 자세하며 침착하고 무게 있는 처리를 강조하며 자신이 쓴 책의 제목을 흠흠신서로 지었다고 합니다.
정약용은 흠흠신서 서문에서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니 인명은 제천이라 한다. 그런데 지방관은 그 중간에서 선량한 사람은 편히 살게 해주고 죄 지은 사람은 잡아다 죽일 수 있으나, 이는 하늘의 권한을 드러내는 일이라.”라고 썼는데, 신중함이 필요한 형사재판의 본질을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사자에게 중요한 사건,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형사재판을 진행할 때에는 ‘흠흠’의 의미를 한 번 더 곱씹으며, 조상님들의 지혜와 노력의 편린이라도 이을 수 있도록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