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압록강 2000리를 가다]프롤로그 ① 아! 압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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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기와 온기의 강, 압록강 2,000리의 기록
- 경계 위의 물결, 민족의 기억 위를 흐른다
- 분단의 경계에서 피어난 한(恨)과 희망

중국 단동시에서 본 북녁 땅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져 있다. 아래 하단이 단동시 아파트 모습이며 두개의 물줄기가 압록강이다. 그 사이에 수해복구 작업이 한창인 위화도가 보인다. 단동=김남덕기자
중국 단동시에서 운행하는 유람선이 관광객들을 태우고 위화도에 세워진 아파트 건물을 배경으로 운행하고 있다. . 단동=김남덕기자
중국 단동 압록강 주변은 주말이면 중국 전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불적인다. 우리 전통 의상을 입고 기념촬영하는 것은 국경도시 단동의 주요한 관광상품이다.. 단동=김남덕기자

고향 마을인 철원 김화 앞에는 화강이 흐른다. 겸재 정선이 그린 '화강백전'의 무대이자, 어린 시절 여름의 기억이 물살처럼 흘러가던 곳이다. 멱을 감고, 물고기를 잡고, 해가 질 때까지 놀던 강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로 우리 곁을 찾아왔다. 때로는 냉탕처럼 시원했고, 때로는 흙탕물처럼 위협적이었다. 강은 우리와 함께 살고, 울고, 웃던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압록강 앞에 서 있다. 중국 단동 시내에서 동쪽으로 10여 분을 걸어 도달한 우리 민족의 강. 온기를 품은 봄바람과는 달리, 이 강은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맞은편 회색빛 도시 신의주는 무표정하게 반대편을 응시한다. 국경선 역할을 하는 강은 새로운 기회를 주는 희망이 되기도하고 끝없이 추락하는 절망의 끝이기도 하다. 수 많은 민족 구성원들에게 생활의 연장선이었던 강은 같은 민족보다 무서운 사상을 구분짓는 경계이기도 하다. 이강은 머리에 뿔이 난 도깨비가 사는 금단의 땅을 아무 표정없이 유유히 흐르는 매정한 정인이기도 하다.

압록강은 민족의 강이라고 불릴 만큼 신화시대로부터 지금까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압록은 물빛이 오리 머리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고 하여 압록(鴨綠)이라 이름을 붙렀다. 또 아리나례강(阿利那禮江)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아리가 ‘태양’의 신령성(神靈性)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고구려조’에는 자칭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가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꾀어내어 압록강가에서 인연을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그 외 고구려 건국 신화와 관련되어 압록강이 신화적 상징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헌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외에도 삼국사기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제왕운기(帝王韻紀)·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등이 있다.

고구려 건국 이후로 줄곧 중심지였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강 유역이 대부분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중류 지역에서 발해 유민들에 의해 정안국(定安國)이 세워졌지기도 했다. 고려는 993년(성종 12) 서희(徐熙)의 외교에 힘입어 강동 6주(江東六州)를 차지해 고려의 북쪽 경계가 처음으로 압록강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또 조선 창업주인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중단하고 의주 대안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

조선시대 청나라로 가는 정부사절단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 길은 연행이라고 불렸으며 당시 세계인식의 유일한 창구이었고,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중심축이자 한․중 문화교류의 대동맥으로 불리는 길이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연행을 통하여 서양 세력들이 아시아를 침탈하려는 움직임을 인식하기도 해 서양세계를 몸으로 배워가는 체험장이기도 했다.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노가재 김창업,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 등이 조선의 미래를 고민하던 많은 지식인들은 이 강을 건너며 세상을 이해하고 사고의 틀을 넓혀 성장시키기도 했다

구한말 가뭄과 일제의 강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압록강을 건넌 조선인들은 동북 3성지역에 흩어져 조국의 독립운동을 염원하며 삶을 살아내고 있다. 일제의 폭압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 발발로 압록강은 북조선을 지원하는 중국 인민군들의 항미원조 전쟁으로 시작점으로 각인되었다. 조선의 시간을 살다간 수 많은 백성들은 권력자들의 실책으로 인해 청나라 군대들에게 끌려 갔다. 말이 다르고 물과 산이 다른 낯선 땅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백성이 압록강에 다다랐을 때 조선은 그들을 매몰차게 돌려보내기 위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조선의 권력층은 그들에게 환향녀라는 꼬리표를 붙인 채 또 다른 차별로 억압했다. 눈물을 삼키며 건넌 압록은 조선 백성들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당시 전쟁 중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단동 철교는 전쟁의 상처를 잊지 않게 해주고 있다. 압록강은 우리의 시조가 탄생한 신화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민족의 심성에 비추어진 민족의 강이라고 할 수 있다. 압록강은 단순한 자연지형이 아니다. 민족의 상처와 열망,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심연이다. 새벽녘, 동쪽 하늘이 여명으로 물들 무렵, 나는 다시 그 강 앞에 섰다. 붉은 해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사람들의 그림자가 강 위로 길게 드리워진다. 국경이라는 이름의 강을 사이에 두고, 같은 민족이 서로 다른 체제를 살아가는 현실이 여전히 이어진다.

압록강은 우리 민족의 애환을 품고 있는 눈물의 강이자 고향의 품이기도 하다. 현재의 강은 병자호란 때 청으로 끌려가 고향을 찾아가는 환향녀처럼 지금도 건널 수 없는 금단의 강이다. 낯선 나라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안도감을 주도 강은 적개심만이 강물 위를 소리 없이 달리고 있다. 새벽 압록강 변에 섰다. 동쪽 하늘에 여명이 비춘다. 나즈막한 산등성 위로 태양이 솟아 올라 강 수면을 물들인다. 북한 주민들과 조선족 사람들의 생활 공간인 압록강의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 강변을 걸었다. 이제 나는 2,000리 압록강을 따라 우리 민족의 흔적을 좇는 여정을 시작한다. 강은 흐르고, 역사는 흘러가도, 그 물살 안에 새겨진 이야기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중국 단동=김남덕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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