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라떼는 말이야]오일장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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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로 약속된 공동체의 기억, 오일장”

◇1989년 3월에 열린 동해북평오일장에서 한 노인이 상인이 펼쳐 놓은 농사기구를 살펴보고 있다. 강원일보 DB.

5일마다 강원도의 장날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바람에 펄럭이는 천막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하면 이 지역만의 시간표가 시작된다. ‘오일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전통 시장은 오랜 시간 지역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매일 열리는 상설시장과는 다른, 날짜로 약속된 오일장의 리듬은 그 자체로 지역의 역사이자 생활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도내에서 운영되는 오일장은 모두 30여개에 달한다. 일부 지역은 상설시장과 오일장이 병행돼 장날이면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인파로 북적인다. 오일장은 단순한 거래의 장을 넘어 지역 공동체를 잇는 생활의 연결망으로 기능하고 있다.

강원도의 전통시장과 장날 문화는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강원도의 장시(場市)는 고립된 산간 지역의 물자 교류와 정보 교환의 중심 역할을 했다. 특히 오일장은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한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뤘다. 강원도는 산악과 해안이 공존하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각 지역별로 특색 있는 시장문화가 발달했다. 삼척부읍지 등에 따르면 동해 북평오일장은 1796년(정조 20년) 개설돼 23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도내 최대의 재래시장 중 하나다. 남대천 둔치에서 시작된 양양장은 현재까지도 강원도 대표 시장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1966년 개장한 정선아리랑시장은 옛 장터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각광을 받으며 대표적인 오일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강원도 대표 오일장으로 자리매김 한 정선아리랑 시장. 강원일보 DB

오일장은 대부분 1·6일, 2·7일, 3·8일, 4·9일, 5·10일 등으로 열리는 일정한 주기를 갖는다. 이 전통적인 운영 방식은 상인들이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장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고안된 체계다. 고정된 날짜는 곧 지역 사람들의 기억이 되었고, 시장이 서는 날이면 자연스레 마을의 시간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1일과 6일에는 고성 거진전통시장, 평창 미탄시장, 홍천 홍천시장, 횡성 횡성시장이 열린다. 특히 거진과 횡성은 상설시장과 오일장이 병행 운영되며, 장날이면 손수 담근 장류와 지역 농산물, 떡과 찰밥 등 계절 먹거리가 좌판을 채운다. 2일과 7일은 정선 아리랑시장, 춘천 풍물시장, 평창 봉평전통시장이 대표적이다. 정선은 산나물과 약초의 집산지로, 봄철엔 취나물과 곰취가 빠르게 소진된다. 봉평은 메밀전병과 전통 먹거리로 관광객의 발길을 모은다.

3일과 8일에는 동해 북평민속시장, 철원 신철원시장, 평창 진부시장이 문을 연다. 북평은 영동권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선짓국과 보리밥 등 토속음식이 강세다. 1950년대 후반 형성된 신철원시장은 6·25 전쟁 이후 형성된 피난민 정착지 기반 시장으로, 공동체 회복의 의미를 지닌 전통 오일장이다. 4일과 9일은 양양전통시장, 영월시장, 평창 대화시장, 태백 장성시장이 장을 연다. 양양은 해산물 위주의 거래가 활발하며, 영월은 시래기와 더덕 같은 내륙 농산물이 중심이다. 주민 간 인사와 대화가 오가는 일상의 장면이 지금도 시장 골목에 이어진다. 5일과 10일에는 정선 임계 사통팔달시장, 평창 장평시장, 철원 동송시장, 홍천 창촌장이 열린다. 정선 임계장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유서 깊은 장으로, 지금도 농산물과 기념품이 공존하는 전통과 현대의 접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1988년 4월 춘천 번개시장의 분주한 모습. 강원일보 DB

강원도의 오일장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공동체의 감각을 지키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물건보다 정이 먼저 오가는 장터의 질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시장 한복판의 국밥집, 좌판 옆 막걸리 잔, 오래된 손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상인의 말투에는 장터가 품고 있는 공동체의 온기가 배어 있다. 춘천의 번개시장 역시 그러한 정서의 연장선에 있다. 중앙시장, 풍물시장과 함께 춘천 시민의 일상을 지탱해온 오래된 상권인 이곳은 매일 열리는 상설시장임에도 불구하고, 오일장의 정서와 유사한 인간적인 온도를 간직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형성된 이 시장은 ‘번개처럼’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풍경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자투리 장터에서 출발한 번개시장은 이후 정착형 상가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생필품과 손수 만든 반찬, 계절 과일 등을 파는 소규모 상점들이 중심을 이룬다. 도시의 중심에서 이어지는 이 재래시장은 오일장과는 운영방식이 다르지만, ‘사람 냄새 나는 장터’라는 본질은 다르지 않다.

점심 무렵이면 시장 곳곳에서 부침개 굽는 냄새가 퍼지고, 시장 골목은 비닐우산과 장바구니를 든 주민들로 채워진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멈추지 않는 이 일상의 장면은 도시화의 속도에서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공동체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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