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신년특집 신춘문예 당선작]시 /책가도

이수국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오크 향 원목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웠다

책을 좋아한 왕이 책가도(冊架圖)를 세워 일월오봉도를 가렸듯

햇살과 달이 가려진 방

창틈으로 들어온 빛이 어둠을 가른다

박물관 유리문 너머 책가도

가로와 세로의 배열 속, 그림 위에 꽂힌 천년의 페이지들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유리문 안을 보는 내 눈이 책가도 위에서 만났다

그림 한구석 은밀히 쓴 화공의 이름이 흔들렸다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

무너지던 중력을 다시 세운 건 한 권의 책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꺼내면

그들의 체온이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오고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꽂는다

이럴 때 사전을 거역하는 것은 유쾌한 일

문장이 자라는 시간

스위치를 켜면 책과 나는 조도가 같아져

수백 년 전 죽은 우린 서로 이마를 맞대며 이야기한다

눈감은 순간에도 새로운 이름이 눈을 뜨고

서로 다른 시계들이 태엽을 돌리면 한 곳에서 만나는 페이지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

바람과 함께 써가는 연대기

이곳에도 낱장 사이 기압골이 있어 새로운 바람이 분다

내 안의 책장을 만지면 나는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

피플&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