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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여인열전 ④김개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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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시에 대한 평가가 담긴 광해군일기[중초본] 69권, 광해 5년 8월 11일 기록.

“김씨는 곧 이른바 김 상궁인데 일찍이 선조의 후궁으로 있다가 뒤에 폐주(광해군)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9월 14일)”

폭군 연산군의 권력을 서슬퍼런 광기와 함께 사유화 한 인물이 장녹수라면 광해군의 폭정 안에 기생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또다른 악녀로는 김개시(金介屎·?~ 1623)를 꼽을 수 있다. 장녹수, 장희빈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요부로 불리고 있는 김개시는 선조와 광해군의 여인으로, 2대에 걸쳐 최고 권력자 곁에 머물면서 막후실세 노릇을 한 패륜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를 중시하며, 그것을 위반했을 경우 ‘강상죄’로 엄하게 처벌하던 조선시대에, 한 여인이 아버지와 아들을 연이어 섬겼다는 사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염집도 아닌 왕실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이를 지켜보는 백성들이 과연 조정에 신뢰를 보낼 수 있었겠는가.

김개시는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줄타기를 하며 선조가 자신의 후계자로 염두에 둔 영창대군 대신 광해군이 왕권을 계승받을 수 있게 만든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에 따르면 “무신년 선조의 승하 당시 약밥에다 독약을 넣었다는 말도 있었다”라는 대목을 통해 광해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선조를 독살한 범인으로 의심을 받을 정도로 광해군 옹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위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광해군이 무한 신뢰를 보낸 2인자 이이첨(1560~1623) 또한 크고 작은 벼슬을 임명할 때, 김개시와 협의를 거쳐야만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실록은 “(김개시의) 권세가 온 나라를 뒤흔들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대부들이 앞다퉈 아부했다.”고 적고 있다.

김개시에 대해 설명할 때 중국 당나라 현종을 시아버지로 모시다 후궁의 자리에 오른 양귀비와 비교하는 경우도 있지만 서시, 왕소군, 초선 등과 함께 중국 4대 미대로 꼽히는 양귀비와 달리 김개시는 상당히 박색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김상궁은 이름이 개시(介屎)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광해군일기[중초본] 69권, 광해 5년 8월 11일)” 이 지점에서 100여년의 간극을 두고 역사 속에 등장했다 사라진 김개시와 장녹수의 묘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외모에 대한 평가가 그렇다. 앞서 언급한 김개시와 마찬가지로 연산군 일기는 장녹수에 대해 “얼굴은 중인(中人) 정도를 넘지 못했다.(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 11월 25일)”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왕의 마음을 움직인 수단은 따로 있었다. 장녹수는 교묘하게 남을 속이는 기술과 아양을 갖추고 있었고 김개시는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計巧·요리조리 헤아려 보고 생각해 낸 꾀)가 많았다(광해군일기[중초본] 69권, 광해 5년 8월 11일·사진)”고 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자신만의 처세술로 왕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리고 두 여인 모두 자신들의 든든한 뒷배들이 반정(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을 통해 모든 권력을 잃고 권좌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보며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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