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산에 연두와 초록이 가득한 시절, 산골에 시인의 오두막이 생겼다.
강릉시 어흘리, 대관령 아래 산골짜기 수국이 어린 꽃망울을 올리고 있는 계곡에 조그만 나무집이 버섯 돋듯 돋아났다. 자그만 책상 하나, 의자 둘로 꽉 차는 작디 작은 집. 동화 ‘백설공주’ 속 일곱 난장이가 금방이라도 문 열고 나올 것 같은 이곳은 강릉서 태어나 자라고 공부한 뒤 출세간했던 시인이 머리에 허연 서리를 덮어쓰고 고향에 돌아와 시를 쓰고 시를 생각할 공간이다. 시인은 이곳을 시막(詩幕)이라 이름지었다. 농막이나 산막, 주막은 들어봤어도 시막이라니. 시인 덕분에 우리 말에 어휘가 하나 더 보태졌다.
시막은 감사와 사랑의 열매다. 역시 강릉서 태어나 이제 100세를 바라보는 정원아버지 최종훈(94)님이 생면부지의 시인에게 지어준 집이다. 정원 아버지가 지난 30년 동안 가꾼 산속 정원은 잘 자란 소나무가 의연하고, 자산홍, 백산홍이 흐드러졌다. 평지보다 기온이 낮은 터라, 작약과 모란이 이제야 한창이다. 오래지 않아 정원의 자랑인 수국이 만발할 터이다. 그런 곳에, 시가 더해졌다. 뜨거운 가슴끼리 만나 문화의 겹이 두터워졌다. 시인과 정원아버지는 지난해 8월 처음 만났다. 93세 농부가 시인의 신작 시집 ‘신의 정원에서’를 읽고 만남을 청했다.
너로구나,
신이 내게 보내준 선물
달의 정령, 연꽃 잎에 가득한
바로 정원 같은 너로구나 ( 신의 정원에서 중 <강릉> 전문)
강릉농고를 나온 정원 아버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고 자식을 낳아 키우고 지금도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고향 강릉이 신의 정원이라는 데 가슴이 울컥했다. 학생 시절 그에게 자부심과 기쁨을 심어주었던 영어 선생님 조순(1928~2022), 국어 선생님 황금찬(1918~ 2017)에게서 받은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시인이 더 많은 절창을 토해낼 자리를 선물하고 싶었다. 평생 흙을 만지고 살아낸 그의 마음 속에는 터져 나오지 않은 시와 사랑이 그득했다. 시인은 시막을 문 여는 자리를 노래와 춤과 시로 가득 채웠다. 시로 쓴 사랑은 노래로 꽃을 피웠고 이제 또 다른 열매를 맺어낼 듯하다. 시막 소식을 들은 원로 연극배우 한 분이 수국꽃 흐드러지는 자리에 책 읽는 의자를 놓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자그마한 동판에 의자 기증자 이름을 쓰고, 배우가 가장 사랑하는 연극 대사를 한 줄 씩 새겨넣어 의자에 앉는 분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산들바람 부는 수국 정원 꽃그늘에서 책을 읽는 호사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랑의 연쇄작용 아닌가!
정원 아버지가 가꾼 산속 정원은 대관령 계곡을 타고 내려온 산들바람과 시원한 나무 그늘, 아름다운 꽃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작은 낙원이다. 시인은 두 평짜리 시막에서 때로는 멍 때리며 때로는 싯귀를 자아내며 기쁨을 직조할 터이고, 배우가 기증한 꽃그늘 의자에서 책 읽는 여행자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할 것이다. 자연은 그대로 두면 거칠지만 문화의 향기가 덧입혀지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렇게 우리 사는 세상은 신의 정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