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청봉]公과 私, 비선들, 들킨 죄…공동체의 미래

공인은 법·원칙 지켜야
사적 인연에 휘둘리면
공동체 구성원이 고통
...
공사 구분 제대로 못 해
궤멸 수준 정치적 패배
똑같은 우 범하지 말길

30년 전 신입 기자 시절 일본을 다녀온 어떤 선배가 “일본 지방 신문사에 갔더니, 거기 편집국장이 해당 지역의 기초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절반 이상의 지역에서 현지 근무를 했었다. 토박이로 곳곳의 사정을 잘 아는 베테랑을 신문 제작 책임자로 배치하는 게 그 신문사의 오랜 전통이더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형식적이고 관행화된 보도를 차단하고,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지방 언론 고유의 역할과 능력을 발휘하도록 인사 시스템을 정착시킨 것으로 해석했다.

일명 중앙지 흉내내기나 수박 겉 핥기식 보도가 아니라, 지역의 속내를 담아내 실질적 변화와 지역민의 생각을 대변하는 매체가 비로소 공감과 지지를 얻는다는 책임감을 시골 기자로서 어렴풋이 갖는 계기가 됐다.

공(公)과 사(私) 구분은 세상살이의 시험대다. 자유민주주의에서 개인의 삶은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고, 권리가 침해되면 안된다. 하지만 공공의 영역에 들어서면 상황은 사뭇 다르다.

개인으로서는 소신과 추진력이라 칭송받던 사안이, 공인이 되면 독단과 독선, 아집, 불통으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나라 전체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대통령 탄핵의 발단도 공사(公私) 구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사적인 관계에서 출발한 조잡한 구상들이 적절한 검증과 공론화 과정 없이 정책으로 입안되고, 개인의 이익을 만족시키는 데 공적 요소들이 악용돼 참극이 빚어졌다.

특정 개인의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도 공적 영역에선 수많은 검증과 확인을 거쳐 시행돼야 한다. 친분 두터운 공무원과 사업자가 ‘이거 괜찮네!’라는 식으로 성급하게 추진한 사업치고 잘되는 걸 보기 어렵다. 남들이 쉽게 할 수 없는 특별한 아이템으로, 사업을 하면 반드시 성공할 거라면서, 왜 그렇게 많은 업무협약이 남발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협약을 매개로 남들이 얻지 못할 특혜를 바란다면 속 보이는 일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는 말로 자신의 부정과 부조리를 합리화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공적 영역의 투명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권력은 크기에 상관없이 똑같은 속성을 갖는다. 지역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하려면 권력자 주변에 팽팽한 긴장과 함께 도덕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꼼수나 비리가 끼어들 틈을 보여선 안 된다. 어떤 이는 말했다. 권위는 자신이 세우는 게 아니라 주변에서 절로 우러나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참모와 주변을 보는 리더의 냉철한 식견과 안목이 요구된다.

사이비(似而非)는 겉보기에 비슷하지만 근본(根本)이 전혀 다르다. 뭔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고,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면 구린 구석이 있다. 공인인 누군가 주변인들의 사익을 우선시한다면 과감히 손절해야 한다. 사적인 라인을 통한 일은 공적으로 반드시 검증돼야 한다.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실패의 확률을 낮춰야 한다. 흉흉한 소문들은 머지않아 그 추한 민낯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인이라면 법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기본 책무다. 사적 인연에 연연해 그것에 휘둘리거나, 당연시하고, 합리화한다면 손가락질과 불신을 불러온다. 혹여 스스로 사적 관계를 앞세우는 리더가 있다면 공동체 발전을 위해 서둘러 퇴출돼야 한다. 곪아서 부패하면 그 짐은 고스란히 공동체 구성원들의 고통으로 분담된다. 공사 구분을 제대로 못 한 대가로 대권과 입법권을 잃고, 궤멸 수준의 정치적 패배를 체험한 세력이라면 그 암담함을 더욱 뼈저리게 곱씹고, 다시 똑같은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들킨 죄’라는 비아냥도 있다. 공과 사를 구분하고, 편향되지 않는 시각으로 무한경쟁 시대 공동체의 미래를 헤쳐 가는 리더십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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