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호등] ‘유능’할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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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화
문화교육부 기자

“무능하고 부패한 지방.”

지역에서 범죄가 발생했을 때, 구조적인 문제가 드러났을 때, 심지어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도 따라붙는 낙인 같은 문장이다. 서울이라고 범죄, 구조적인 문제,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은 적 없거늘, 장소가 ‘지방’이면 어김없이 ‘무능’과 ‘부패’를 질타하는 비난들이 뒤따른다. 범죄의 원인을 찾는 대신 정신질환을 낙인찍고, 저출생을 유발하는 사회를 바꾸는 대신 여성을 비난하고, 공공 인프라를 개선하는 대신 장애인을 차별해 온 한국 사회의 유구한 ‘문화’일까. 이 ‘문화’는 이제 준엄한 능력주의의 이름으로 ‘지방’을 꾸짖는다.

의료 인력 문제로 새삼스레 난리가 나던 지난 몇 개월간에도 똑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지방의료원에서 연봉을 4억원씩 내걸어도 응급실 의사를 구하지 못한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지역이 받은 것은 연대보다는 비난과 타자화의 시선이었다. 폐쇄만큼은 막아 보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주민들의 등 뒤로 “일상을 즐길 인프라도 없고 의사로서의 비전도 못 찾는 열악한 지방에 누가 가겠냐”는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그중 누구도 지역을 ‘열악’하게 만든 대가로 누군가는 부를 쌓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고통이 ‘무능’의 결과로 치환되는 동안 축적된 담론장은 더 처참했다. ‘뺑뺑이’ 돌 응급실조차 없는 주민들의 사정을 핑계 삼아 ‘무려’ 서울 혹은 대도시에서 ‘구급차 뺑뺑이’를 돈다며 탄식하는 말들이 공론장을 장식했다. 주민들이 응급실을 찾아 태백산맥을 넘다 숨지던 지난 세월 그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았던 정부는 ‘서울에서’ 응급실이, 수술할 의사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잇따르자 심각한 얼굴로 ‘지역’필수의료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나섰다. 기만이었다. 의료수가 운운하는 소리가 시끄럽던 그 대책에는 지역의 사정을 낫게 만들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유능은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유능할 ‘권력’이 있다는 뜻임을 나는 그제서야 알게 됐다.

지금, 불형평한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유능’할 권력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지역이라서 정부가 나서기 전까지 못 한다.” “지역 의료는 무능해서 못 믿는다.” 익숙한 말들을 아프게 돌아본다. 어쩌면 지역사회도 서울공화국이 만들어낸 ‘유능’의 저주 안에 아직까지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익숙한 말들을 ‘익숙하게’ 여겼던 시간이 부끄럽다.

서울로 대표되는 계급과 권력이 정의감마저 독점하는 시대, ‘유능’할 권력은 불형평한 구조 뒤에 숨어 불평등한 일상을 정당화한다. 소득, 계급, 젠더, 학력 등 한국 사회를 촘촘하게 가로지르는 다양한 불평등은 지역과 교차하며 ‘우아한’ 차별로 재생산된다. 억압의 대상이 됐던 사람들이 불평등을 내면화하는 현상은 새롭지는 않다. 다만 부당할 뿐이다. 해방이나 진보를 상상하는 힘은 값비싼 지적 자산이다. ‘부패한 지역사회’ 혹은 ‘무능한 지방’ 뒤에는 남의 자산을 착취해 비로소 ‘유능’할 권력을 얻은 사람들이 있다. 지역을 둘러싼 지식과 담론의 정치는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리라. 내려다보듯이 지역을 말하거나 쉽게 정의감을 획득하려는 언설을 경계하며 신발끈을 새로이 묶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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