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먹고 사는 일이 결코 녹록치 않던 시절.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이들에게 ‘리어카(rear car)’는 팍팍한 삶을 구제 할 희망을 품게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리어카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피폐를 몸소 경험하며, 몸으로 때우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사람들이 가입해야 했던 보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모두 다 가난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호구책으로 리어카 한 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도 당시에는 큰 행운이었다. 물건을 옮기는 같은 용도라고 해도 무게를 오롯이 양 어깨로 지탱해야 했던 ‘지게’에 비하면 엄청난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무언가를 싣고 옮기는 단순한 임무 말고도, 물건을 사고 파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때로는 놀이기구로 변신하기도 했으나 사람마다 갖고 있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이 녹아있겠는가. 국립국어원에서 ‘손수레’를 순화어로 사용하라고 권장하고 있지만, ‘리어카’로 이름 붙이고 함께 한 세월이 줄 수 있는 뉘앙스의 차이는 분명 따로 있는 듯 하다. ‘하꼬방’과 그 순화어인 ‘판자집’이 주는 느낌이 조금은 다른 것 처럼 말이다.
■리어카는 콩글리시?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일본에서 발명된 ‘리어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0~1930년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토바이 옆에 사람을 태우거나 물건을 싣기 위해 설치한 ‘사이카(sidecar)’를 본따서 자전거 뒤에 설치해 끌고 다니던 것이 리어카의 시작으로 보고 있는데, 정식 영어가 아닌 일본에서 넘어온 이른바 ‘쟁글리시(Janglish)’ 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언론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던 시기도 1930년대로, 주로 ‘리야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에는 일제에 의해 ‘리야카세(稅)’까지 내야 했다고 하는데, 나라 잃은 민초들의 삶을 더 힘들게 하는 악질적인 징세였다. 자전거는 물론이고 인력거에도 세금을 붙였으니, 자전거에 리어카를 연결해 다니던 사람들은 자전거와 리어카에 모두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이중과세’라고 하면서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리어카꾼의 등장
리어카의 가장 중요한 용도가 물건을 옮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직업으로 삼는 ‘리어카꾼’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된다. 분명 지게꾼도 있었지만 한번에 나를 수 있는 양 자체가 달랐으니 운반 시장(?)도 자연스레 나눠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리어카꾼과 지게꾼의 컬레버레이션이 이뤄지기도 했는데, 넓은 길에서는 일단 리어카로 물건을 옮기고 좁은 골목길은 지게로 옮기는 식의 협업을 하거나 리어카 꾼이 아예 지게를 싣고 다니면서 겸업을 하기도 했다. 리어카꾼들은 주로 역이나 터미널 등에서 상주해 있다가 열차나 버스가 도착한 후 여행객들의 짐을 옮겨주는 역할을 했는데, 연탄 사용량이 큰 폭으로 늘어나고 연탄배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리어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수송비 또한 상승을 하게 되는데 지자체가 나서 이를 엄격하게 단속하기도 했다.

■리어카의 변신
바퀴가 3개 달려 ‘삼발이’라고 불리는 삼륜차가 기아산업에 의해 1962년부터 국내 조립생산을 시작하고, 1970년대에 접어들어 일반에도 널리 퍼지면서 연탄은 물론 쌀이나 배추 등을 실어나르는 임무가 대부분 넘어가게 된다. 자연스레 짐을 나르는 용도로서의 리어카 역할에 한계가 생기지만, 다양한 용도로 그 쓰임새가 분화하면서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게 된다. 동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생필품을 판매하는 만물상이 되기도 하고, 꼬마들이 가져오는 멀쩡한 고물을 받고 번데기 한 움큼으로 값을 치르는 고물상의 창고가 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술이나 간단한 안주를 파는 포장마차도 리어카 없이는 불가능했고, 서울 남대문시장 안에는 리어카 점포들로 구성된 ‘리어카장’까지 차려지게 된다. 도내에도 춘천 명동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리어카에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노점들이 크게 늘어난다. 심지어 놀이기구인 ‘리어카 목마’까지 등장한다.

■리어카의 오늘
리어카는 기동성(?)을 갖춰 단속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으니 점포가 없는 노점상들에게는 잇템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점포 상인들의 문제제기와 화제 위험 등으로 노점을 단속하고 철거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단속을 피할 때 기동성도 좋았지만 단속을 하거 철거할 때도 또한 편리했다. 바퀴게 달려 있으니 그냥 끌고 가버리면 됐다. 단속원들이 리어카를 통채로 끌어내 시청이나 군청 앞마당에 가져다 놓기도 하고, 심할 경우는 리어카의 바퀴살을 잘라내거나 판매하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압수하기도 했다. 이과 정에서 고성과 눈물이 오가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기억과 추억에 남은 리어카는 이제 폐지수거 노인들의 반려로, 강원일보의 골목실험실을 통해서 또다른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