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산후 후유증(상편 참조·본보 19일자 20면 보도)으로 세상을 떠난지 7년 후인 1522년 9월5일 의녀 장금의 이름은 다시 실록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중종은 대비전(大妃殿)의 증세가 차도를 보이자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게 되는데 의원 하종해에게 말 한 필과 쌀·콩 각 10석, 의녀 신비와 장금에게는 각각 쌀과 콩 10석씩을 하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중종실록 46권, 중종 17년 9월5일) 여기서 대비전은 중종의 어머니인 자순대비(정현왕후·1462~1530)를 높여 칭한 것이다. 이날 중종이 신하들에게 내린 상은 풍증(風症·중풍)을 앓고 있던 자순대비가 감기에 걸린 것을 걱정하며 의녀에게 곁을 지키며 진찰하게 하고, 의원인 하종해와 김순의를 전문(殿門·근정문) 밖에 대기시키고 의녀가 전하는 말을 듣고 약을 지어올리게 한 것(중종실록 45권, 중종 17년 8월15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이처럼 임금의 신뢰를 쌓아가던 의녀 장금은 1524년 12월 마침내 중종의 거처를 오가며 병 치료를 맡는 위치에 까지 오른다. 실록에 따르면 중종은 의녀의 요식(料食·급료)에 대해 언급하며 비어있는 전체아(全遞兒)를 장금에게 주라고 명한다. 장금의 의술이 무리 중에서 뛰어나고, 대내(大內·임금이 거처하는 곳)에 출입하며 간병을 하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중종실록 52권, 중종 19년 12월 15일) 전체아는 상시 근무하며 급료의 전부를 받을 수 있도록 특별히 대우해 만든 벼슬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부터 실록에서는 장금을 대장금(大長今)으로 기록한다. 대장금은 조선시대 최고의 의녀, 명실상부한 중종 주치의로서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본래 의녀는 남녀의 구분이 엄격한 조선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태종 6년인 1406년 지제생원사 허도가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이 진맥하고 치료하게 하면 부끄러워 치료받기를 꺼려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나이 어린 여자아이들을 골라 의약을 가르치게 해달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그것이 받아들여 지면서 의녀 제도는 시작된다.(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 3월 16일)
이처럼 의녀의 역할은 의원을 보조하거나 여성을 진찰하는 것에 국한돼 있었다. 그런 한계를 넘어서 남성 그것도 옥체(玉體)라고 불리는 임금의 몸에 손을 대고 진찰을 하는 일을 의녀에게 맡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장금은 그러한 금녀의 벽을 실력 하나로 넘어선 불세출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1532년 10월 풍한증으로 오른쪽 어깨가 붓고 통증을 느낀 중종은 의원 하종해와 홍침을 불러 자신의 맥을 짚은 의녀(대장금)의 말을 듣고 약을 올리라고 지시한다. 이러한 대장금의 모습을 내의원에 있는 남성의원들이 곱게 볼리 없었다. 내의원 제조 장순손과 김안로는 중종에게 “지금 의녀에게 진맥을 하게 하는 것은 마음에 편치 못합니다. 의녀의 의술이 의원(醫員)만 못하니, 의원으로 하여금 들어와서 살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아뢴다. 시새움과 불신이 가득한 이들의 요청에 중종은 재차 맥을 짚도록 허락한다.(중종실록 73권, 중종 27년 10월 2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