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사람들은 어린애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자세를 낮춘 다음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건넨다. 너 정말 예쁘다고. 널 만나서 신난다고. 당장은 알아듣지 못해도 환대의 언어를 들으며 아이들은 자란다. 그 사회의 문화가 그렇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환대가 넘치는 나라. 그리스에서 태어난 내 아이도 그러한 환대 속에서 컸다.
몇 년 후에는 제네바에 지낼 기회가 있어서 시내에 집을 얻었다. 살갑게 말을 거는 이웃도 없고 아이에 대한 경탄도 듣지 못했다. 남유럽 지중해 사람들의 감정 과잉과 북쪽 동네의 경직된 분위기가 비교됐다. 당시 나는 네 명의 아이와 살았는데 매일 호수로 산책을 나갔다.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됐다.
그 횡단보도에서 봤다. 차가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광경을. 우리가 횡단보도에 서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차들이 놀라운 속도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횡단보도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서부터 차들이 멈추다시피 기어오고 있었다. 그 행렬이 수백m가 넘었다. 황홀한 광경이었다. 아이들은 왕이 된 기분으로 길을 건넜다. 가장 나중 아이가 끝까지 길을 건너간 걸 확인하고서야 맨 첫 줄의 차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뿐이 아니다. 제네바의 차들은 시력도 끝내준다. 횡단보도 근처에만 가도 오던 차들이 알아서 멈춘다. 그들에겐 그것이 당연한 거였다.
제네바 시민들은 확실히 지중해 사람들과 달랐다. 아이들을 대놓고 사랑해주지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예의를 지켰다. 제네바 사람들은 바쁘지도 않나. 그렇지도 않았다. 오전 6시부터 빵집이 문을 열고 첫 손님을 받는다. 출근자들을 태운 버스 운전자는 어떤가. 이들은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이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것이 일상이다. 바쁜 것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이 도시에 살다 보면 사람의 목숨과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제 나는 무대를 옮겨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학교 가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아이들이 죽는 나라다. 아이들의 부주의를 탓하는 나라다. 민식이법을 조롱하고 스쿨존에 불만을 터트리는 나라다. 길 한번 건너려고 아이들이 차가 다 지나갈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는 나라다. 횡단보도 근처에서 차를 멈추면 아이들이 나더러 먼저 가라고 기다려준다. 그래도 안 가고 버티면 고개를 숙이고 고맙다고 인사하는 아이들이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이상한 나라다.
우리는 분명 잘못됐다. 속도는 30이 아니라 더 줄여도 된다. 불편한가? 우리는 계속 불편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죽지 않는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스쿨존의 탄력적 운영을 언급하며 기껏 만들어 놓은 제도를 거꾸로 되돌리려 한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스쿨존 위를 마음 졸이며 지나는 트럭운전자나 출근자들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다. 민식이법을 불편해하는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이제 그들은 급기야 어린 시민들을 혐오의 리스트에 올렸다. 분란을 조장하며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 한다. 여기 휘둘리지 말자. 제네바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어서 그런 문화가 생긴 게 아니다. 내 목숨을 소중히 여겨주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다. 답은 간단했다. 길 위에서 대접받은 아이들이 커서 좋은 시민이 됐다. 어린이 시민들을 환대하고 대접하라. 대한민국이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