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스물일곱 살 청년 허균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정유재란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는 절박함을 품고 명나라로 향하는 외교 사절의 일원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 광활한 요동 평원을 가로질렀다. 그렇기에 문집 《성소부부고》에 수록된 시 〈고평〉에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변방을 통과하던 사신으로서의 비장함과 조국을 뒤로한 허균의 처연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허균은 시에 ‘긴 성벽은 무궁화 벌판을 가로막았네(長墻限槿原)’라는 구절을 새겼다. 여기서 ‘근원(槿原)’은 무궁화가 펼쳐진 땅을 뜻하며, 이후 조선을 지칭하던 별칭 ‘근역(槿域)’과 궤를 같이한다. 이 시의 제목이자 허균이 시를 지은 장소인 고평은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 판진시 일대로 추정된다.
이곳은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냉대 대륙성 기후 지역이어서 무궁화가 생태적으로 대규모 군락을 이루기 어려운 환경이다. 때문에 그가 기록한 근원은 눈앞의 실경이 아니라 고평의 성벽 너머로 떠올린 고국을 가리킨다. 근원이란 허균에게 있어 타국의 풍경 위에 투영된 마음속의 조국이었다.
허균이 불러낸 ‘근원’이라는 표현은 897년 최치원이 신라를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 나라’로 칭했던 전통이 정확히 700년의 시간 차를 두고 다시 등장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최치원 이후 무궁화로 국가 공간을 직접 표상한 사례가 드물었던 상황에서 허균의 이 기록은 단절된 역사적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더욱이 전쟁 중 기록된 문건으로서 무궁화 상징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적지 않다.
지도 위에서 무궁화로 표상된 국토 인식은 20여 년이 흐른 뒤, 허균이 은거의 이상향을 담아낸 《한정록》에 이르러 한 개인의 집 마당 끝으로까지 이어진다. 1618년 《한정록》에 수록된 〈한적〉에서 허균은 명나라 문인의 기록을 인용하여 이상적인 은거지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삼간초가를 짓고서 ‘무궁화 가지를 꽂아 울타리를 만드는 것(揷槿作籬)’을 ‘노년을 즐겁게 보내기(娛老)’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꼽았다. 여기서 ‘근리(槿籬)’는 무궁화로 조성한 산울타리를 뜻한다. 요동 벌판에서 가슴에 품은 조국을 노래했던 ‘근원’이 이제 평온한 노년을 지켜주는 소박한 안식처로서의 ‘근리’가 된 것이다.
무궁화에 은둔의 미학을 입힌 기록을 남긴 1618년, 허균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모에 연루되어 생을 마감한다. 이로써 마당 끝에 연분홍 무궁화를 심고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자 했을 그의 삶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채 문장 속에만 남았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이 주거의 문법은 이후 조선의 대표 농업서 《산림경제》와 《임원경제지》에 계승되어 당대 이상적인 주거 문화의 전형으로 소개된다.
허균이 두 편의 글에 남겨놓은 무궁화는 지도 위에서는 전란 속 꺾이지 않는 조국의 표상이었고, 민초들의 삶터에서는 소박한 생활 공간의 테두리였다. 이런 무궁화에 대한 그의 인식은 18세기 한반도 전체를 상징하는 인문적 영토인 ‘근역’, 나아가 ‘무궁화 삼천리’를 완성하는 마중물이 되었을 것이다. 400여 년 전 허균이 남긴 무궁화에 대한 선구적 기록은 기나긴 시간을 건너 오늘 우리 앞에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의 천재성이 무궁화 상징사에서도 빛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