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5년의 을묘원행이 노론 벽파를 향한 정조의 ‘서늘한 경고’였다면, 그 경고를 영원히 박제해 세상에 공표한 수단은 바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였다. 정조는 왜 자신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금속활자로 찍어 전국에 뿌렸을까. 그것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되돌릴 수 없는 사실로 확정 지으려는 군주의 치밀한 ‘기록 정치’였다.
조선 시대 의궤는 본래 왕실의 전유물이었다. 대부분은 왕이 보는 ‘어람용’과 보관용인 ‘분상용’으로 단 몇 권만 필사돼 깊숙한 사고(史庫)에 보관됐다. 하지만 정조는 이 관례를 깨뜨렸다. 그는 1794년(정조 18년)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이듬해 새로운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를 주조해 의궤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
정조가 굳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활자본을 고집한 이유는 명확했다. 기록을 궁궐 안에 가두지 않고 전국의 주요 관청에 배포해, 을묘원행이라는 ‘정치적 이벤트’를 조선의 공식적인 ‘표준’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를 죄로 규정했던 세력들에게 “이제 이 기록이 조선의 역사다”라고 선언하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앞서 다룬 장용영(壯勇營·본보 22일자 20면 보도)’의 무력이 ‘순간의 힘’이었다면, 활자로 인쇄된 의궤는 그 힘을 ‘영원한 사실’로 고정하는 장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그림들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참여해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졌다 . 특히 이 의궤는 이전의 의궤들과 달리 행사 장면을 종합하고 재구성해 시각적 홍보 효과를 극대화했다 .
주목할 점은 그 정밀함의 수준이다. 잔치에 올린 음식의 높이와 재료의 양까지 수치로 기록된 데이터는 현대의 설계도와 다를 바 없다 . 예를 들어,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인 봉수당진찬에 사용된 각종 기물의 치수와 재료비까지 낱낱이 기록돼 있다. 이 의궤를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영화 ‘의궤, 8일간의 축제’ 제작진이 의궤를 기반으로 3D 모델링이 가능했던 이유다. 이는 단순한 삽화를 넘어, 행사의 모든 요소를 데이터화해 기록한 ‘기록의 빅데이터’였다.
정조의 기록 정치는 지식인 계층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한문을 모르는 부녀자와 백성들을 위해 한글로 번역된 ‘정리의궤’도 함께 제작했다 . 이는 자신의 효심과 정치적 정당성을 온 백성에게 직접 호소하려 했던 정조의 ‘소통 저널리즘’이었다.
한글본 정리의궤는 한문 원본을 단순히 번역한 것이 아니라, 날짜순으로 기록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됐다. 정조는 이를 통해 자신의 원행이 단순한 왕실의 잔치가 아니라, 백성과 함께하는 축제임을 알리고자 했다. 이는 기록을 권력의 도구가 아닌, 백성과의 소통 창구로 활용하려 했던 정조의 ‘민국(民國)’ 사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조에게 기록은 곧 미래였다. 그는 자신이 겪은 비극과 그것을 극복해낸 승리의 서사가 왜곡되지 않기를 바랐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그 집념이 낳은 기록학적 기적이다. 정조는 이 의궤를 통해 자신의 통치 철학을 시각화하고, 이를 활자로 박제함으로써 반대 세력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조는 을묘원행의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행차가 사치나 낭비가 아닌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는 숭고한 행위였음을 증명해냈다.
오석기기자 sgtoh@kw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