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The 초점]영월의 강물에 띄운 두 개의 ‘유배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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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광열 (재)영월산업진흥원장

최근 내 고향 영월이 ‘왕과 사는 남자’라는 독특한 스토리텔링으로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영월은 이제 단순한 유배지를 넘어 역사적 감성이 살아 숨 쉬는 ‘핫플레이스’로 부상하는 중이다. 하지만 영월의 화려한 변신 이면에는 ‘유배의 길’이라는 같은 이름의 형벌을 서로 다른 결로 살아낸 두 사내의 치열한 삶의 기록, 즉 팩트(Fact)가 흐르고 있다.

영월의 험준한 산세는 누군가에게는 왕좌를 빼앗긴 채 머물러야 했던 절벽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차마 하늘을 볼 수 없어 스스로를 가둔 삿갓 아래의 세상이었다. 방랑의 상징인 난고(蘭皐) 김병연과 비극적 군주인 단종. 영월이라는 공간에서 기묘하게 교차하는 이들의 ‘유배의 길’은 오늘날 우리에게 ‘부끄러움’과 ‘책임’이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먼저, 단종에게 영월은 ‘강제된 절벽’이었다. 1457년,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등된 17세의 소년 임금에게, 청령포는 천혜의 감옥이었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이고 뒤편은 험준한 육육봉 암벽으로 막힌 이곳에서 단종은 타의에 의해 존재를 부정당했다. 한양을 향한 그리움으로 쌓은 ‘망향탑’과 서럽게 울었다는 ‘자규루’에는 권력의 비정함이 강요한 철저한 단절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반면, 김병연에게 영월은 스스로 써내려간 마음의 감옥, 즉 ‘자발적 유배’의 길이었다. 그의 방랑 뒤에는 처절한 역사적 비극이 숨어있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조부였던 선천부사 김익순이 반란군에 투항한 죄로 집안은 폐족(廢族)의 멍에를 썼다. 이 사실을 모른 채 20세의 김병연은 영월도호부 백일장에서 조부 김익순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써 장원을 차지한다. 뒤늦게 천륜을 어겼다는 진실을 마주한 그는 스스로 하늘을 등진 채 삿갓을 썼고, 평생을 떠도는 정신적 유배객이 되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짊어진 속죄의 창살이었다.

만약 시공간을 초월해 영월의 안개 속에서 두 사람이 마주쳤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유배의 무게’를 던졌을 것이다. 청령포에 갇힌 단종이 “그대는 팔도강산을 유람하니 자유롭지 않은가”라고 묻는다면, 삿갓을 깊게 눌러쓴 김병연은 이렇게 답했을지 모른다. “전하, 몸이 갇힌 유배는 언젠가 기한이라도 있으나, 양심이 스스로를 가둔 유배는 죽어서야 그 문이 열리는 법입니다.” 한 명은 밖으로부터 문이 잠겼고, 다른 한 명은 안으로부터 문을 걸어 잠근 셈이다.

오늘날 영월이 새롭게 조명받는 이유는 이 상반된 두 유배의 길이 현대인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강렬하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해 소외당하는 ‘강제된 고립’과, 스스로의 기준과 자책감에 갇히는 ‘자발적 유배’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내면의 풍경과 닮아 있다.

이제 영월은 더 이상 버림받은 이들의 땅이 아니다. 비극적 역사를 문화적 자산으로 승화시킨 이곳은, 삶이라는 거대한 유배지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잠시 멈춰 서서 그 무거운 삿갓을 내려놓아도 좋다”고 위로를 건네는 치유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우리가 걷는 영월에서 유배의 길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벌했던 선비의 고결한 영혼과,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끝내 잊히지 않은 어린 임금의 슬픈 눈물을 동시에 마주하는 성찰의 길이다. 강제와 자발, 그 경계에서 고뇌했던 두 영혼의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쉼없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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