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달 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이 우리나라 국민의 정신건강과 관련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장기적 울분 상태’라고 한다. 이와 함께 응답자의 70%가 ‘기본적으로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0년도 훨씬 전, 경제학자 김기원 교수는 우리나라 국민의 3대 키워드로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을 꼽았다. 국민은 이 세 가지 어려움의 해소를 갈구하는데 정치가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집단적인 ‘화병(火病)’ 상태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장기적 울분’ 혹은 ‘화병’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게 지난 12·3 비상계엄 사태부터 시작된 6개월이다. 양편으로 쪼개진 국론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광화문에서, 헌법재판소 앞에서, 그리고 각종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자신의 울분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이러다 나라가 결딴나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폭발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조기 대선이 치러지고 이재명 대통령 당선으로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해소된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세계 상위권이다. 지난해엔 경제 대국이라고 일컫는 일본의 1인당 GDP를 넘어섰다. 한국인의 평균 소비수준도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은 여전히 절반 이상이 ‘장기적 울분 상태’다. 고단하고, 억울하고, 불안하다고 호소한다. 왜 그럴까?
앞에서 소개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의 조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응답자들은 입법·사법·행정부의 비리나 잘못 은폐,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 등을 주요 이유로 들었다. 한마디로 말해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로 인해 국민 분노가 만연해 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일차적인 책임은 정치에 있다.
무엇보다 정치가 바로 서야 한다. 김종필 전 총리는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했고, 이회창 전 총재는 “정치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고 했다. 이 헛되고 헛된 백일몽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푸른 꿈이 되려면 먼저 정치권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
많은 국민과 언론이 새 정부의 우선 과제로 경제와 민생을 꼽지만, 소승의 생각은 다르다. 더 시급한 게 신뢰회복이다. 신뢰는 ‘낮은 곳을 아우르는 자비’에서 비롯된다. 앞서간 선현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공자는 “부족함을 탓하기 전에 공평하지 못한 걸 돌아보라”라고 했다. 예수는 헐벗고 고통스러워하는 민중 속에서 부활했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후 높은 법대(法臺)에 오르는 대신 가장 가난한 도시인 쿠시나가라로 향했다. 약자의 아픔을 진정 아파하지 못하는 정치는 제아무리 외형적 큰 성과를 냈다 해도 허업(虛業)이고 남가일몽(南柯一夢)이다.
다행히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선서 후 가장 먼저 국회의사당 청소 노동자들을 만났고, 대통령실에서도 급식소 조리사들을 만나 ‘사모님’이라고 칭하며 격려했다. 절망에 빠진 소상공인, 취약계층,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 약속이 임기 내내 쭉 이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다만, 신뢰회복의 또 다른 축인 인사(人事)는 전 정부들과 견줘 한 치 앞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취임 열흘 만에 벌써 민정수석이 사퇴했고, 총리 지명자는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려 있다. 유능함과 청렴함을 동시에 갖춘 인물을 찾는 게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렵다고는 하지만, 인사는 가장 중요한 국정 메시지다. ‘속도’보다는 ‘숙고’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