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강원의 점선면]강물과 바위로 빚은 무대…풍류를 노래하는 천년 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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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죽서루

◇삼척 죽서루

오십천 물길 따라 걷다 보면 바위와 물이 빚은 무대 위로 한 누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삼척 죽서루. 바람이 스미고 햇살이 머무는 곳.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물소리를 벗 삼아 선 누각은 계절마다 풍경을 달리하며 살아 숨 쉰다. 바위 절벽에 기대어 선 기둥들은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그 자리를 지켜왔고, 누각을 감싸는 오십천은 오늘도 쉼 없이 흐른다.

죽서루의 기원은 고려 명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인 김극기의 시에 등장하며 존재를 알린 이 누각은 조선 태종 3년, 삼척부사 김효손에 의해 중건된다. 이후 중종, 정조 시대를 거치며 남쪽과 북쪽으로 차례로 증축되었고, 오늘날의 정면 7칸 비대칭 구조를 갖추었다.

중앙부는 조선 전기 주심포 양식, 양쪽 증축부는 조선 중후기의 익공식 구조가 더해져 시대의 흐름을 품는다. 이처럼 건축의 중심부와 양측이 서로 다른 양식을 품고 있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죽서루를 단순한 누각을 넘어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 만든다.

누각의 기둥들은 자연 암반을 초석 삼아 세워졌고, 일부는 바위 틈새를 메운 전통 기법인 그렝이질이 활용되어 건축물의 안정감을 더했다. 누각을 떠받치는 총 22개의 기둥 중 13개가 바위 위에 직접 맞닿아 세워져 있다는 점은 자연지형과의 조화 속에서 전통 건축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삼척 죽서루

겹처마로 꾸며진 팔작지붕은 기품을 더하고, 사방이 트인 마루 구조는 자연을 온전히 누리게 한다. 단순히 경관 감상의 용도를 넘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공간미를 구현한 점에서 죽서루는 한국 전통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풍경만큼이나 깊은 문화적 무게도 있다.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죽서루를 관동팔경의 으뜸으로 노래했고, 겸재 정선은 관동명승첩에 절경을 담았다. 조선 임금 숙종과 정조는 시를 남겼고, 부사 이성조는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을 걸며 자부심을 더했다. 죽서루에는 총 28점의 현판과 시판이 걸려 있는데, 태풍 사라로 일부 유실된 것을 복원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곳을 찾은 문인들은 누각에 올라 풍광을 즐기며 시를 읊었고, 글씨를 새긴 편액이 누각 곳곳을 수놓았다.

문화재적 가치 또한 빼어나다. 1963년 보물(제213호)로 지정된 데 이어 2007년 죽서루를 둘러싼 오십천의 풍취를 더해 명승(제28호)에도 이름을 올린다. 2023년에 이르러서는 국보로 승격된다.

특히 바다 풍경이 대부분인 관동팔경 가운데 유일하게 강과 절벽이 어우러진 경관을 지닌 점이 독보적이다. 누각 위에서 내려다보면 강물과 산세가 펼쳐지며 관동제일루란 이름이 실감난다. 역사, 예술, 건축이 조화를 이루며, 죽서루는 그 자체로 삼척의 시간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유산이다.

시대마다 보수와 증축이 이어지면서도 조선 초기의 원형을 간직한 점 역시 국보로서의 위상을 뒷받침한다.

◇삼척 죽서루

삼척시는 죽서루를 살아 있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밤이면 조명이 비추고 전통 음악이 울려 퍼지며 삼척 문화유산 야행이 열린다. 관아 행렬 재현, 전통 공연, 지역 특산물 장터까지 풍성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관광객들은 누각에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체험을 하며,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밤을 보낸다.

죽서루 주변으로는 삼척부 관아 유적 복원이 이루어지고, 옛 도심인 성내동 일대가 역사문화 거리로 재탄생하고 있다.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죽서루를 찾는 이들은 인근 시장과 골목길에서 머물며 삼척의 매력을 즐긴다. 삼척시는 죽서루를 중심으로 문화관광지구 조성을 추진 중이며, 관광과 지역 상권이 상생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마련하고 있다. 전통시장 할인쿠폰 제공, 지역 특산품을 활용한 기념품 개발 등으로 죽서루를 찾은 발걸음이 지역경제로 이어지게 하고 있다.

지역 농특산물 직거래 장터와 함께 열리는 문화 행사는 주민과 방문객을 이어주는 장이 되고 있다. 죽서루는 오늘도 물소리와 바람소리 속에서 천년 풍류를 이어간다. 누각에 앉아 멀리 시선을 두면 관동제일루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과거의 멋이 오늘을 물들여 미래로 흘러간다. 삼척의 시간은 그렇게, 죽서루 위에 머물고 있다. 사계절 내내 빛깔을 달리하는 풍광 속에서, 죽서루는 강원도의 역사를 품은 채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고 있다.

오석기기자 sgtoh@ / 편집=신현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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