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늦은 파주 교하에도 마침내 벚꽃이 피고 작약 움은 돋는다. 버드나무 가지마다 연두색이 짙어가는 화창한 봄날에도 나는 마냥 즐겁지는 않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맥이 풀리고 울적하다. 어쩐지 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무한한 공간의 왕”(연극 ‘햄릿’의 대사)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파트는 높아졌지만 시야는 좁아졌다는 생각이 들 때, 배움의 이력이 늘어 쓸데없는 지식은 많아졌지만 정작 어떻게 살지를 모를 때 마음은 갈팡질팡 한다. 쩨쩨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소란스럽다. 그러면 ‘나는 비정하지만 조용합니다/무심하지만 평온합니다/나는 잘나지 못했지만 혼자 잘났습니다’.(김경미 ‘약속이라면’) 같은 시를 읽으며 마음의 소란을 다독이는 것이다.
살아가는 날마다 중대한 결심이 필요치는 않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의 완만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평정심을 갖는 게 더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멍청해지기로 하고, 어제보다 오늘 더 빈둥거려도 좋겠다. 항상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세상을 끌고 내달리니까. 세상은 더 풍족해지는 듯하고 데이터의 양은 나날이 쌓인다. 그 양적 팽창이 만드는 지식은 삽시간에 전지구로 퍼진다. 과학, 산업, 기술은 혁신을 좇는 가운데 세상이 퇴보할 거라는 생각은 설 자리가 없다. 그 대신에 기술과 산업의 발달로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질 거라는 기대는 부푼다. 더 많은 이윤을 내는 게 최선이라고 선전하는 세상에서 최선이 아닌 것은 최악 취급을 당한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덜 영악하고 잇속을 덜 밝히고 어슬렁어슬렁 거닐며 바보로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이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합법칙적인 물질세계에 산다고 말한 이는 유명한 과학자다. 그는 인간 본성을 탐구한 연구자이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다. 바로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낸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이란 책에서 ‘별들의 탄생에서 사회제도의 운용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중략) 물리적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인간은 이전 세기보다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게 된 사실조차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과거보다 분자, 원자, 생태계, 세포, 유전자, 염기서열, 별, 우주를 훨씬 더 많이 알게 되고, 과거와 견줘 생활의 편리는 늘고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며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과연 인류는 얼마만큼 더 똑똑해지고, 우리 삶은 어디까지 향상될 것인가.
한편으로 플라스틱 폐기물이 바다를 떠돌고, 엄청난 양의 핵폐기물은 지구에 쌓인다. 과학만능주의가 퍼뜨린 미래에 대한 낙관은 더 난망해지고, 과학이 기후재난 같은 인류의 숙제를 해결할 거란 기대는 어그러진다. 삶을 기계적으로 계측하고 항상 예측가능한 것으로 바꾸려는 이성의 기획에서 제 몫을 찾는 과학자와는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게 시인들이다. 과학자들이 물질을 계량하고 수치화해서 합목적적 논리 속에서 모든 것을 법칙과 원리들로 환원시킨다면 시인들은 자연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영감과 상상으로 존재의 숨은 숭고성과 신비를 콕 집어낸다. 오직 시인만이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라고 쓸 수 있을 테다.
봄날의 하루가 아무 일이 없어도 저무는 동안 나는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펼쳐들고 겨우 한 줄의 시를 읽었다. 먼저 핀 목련꽃들이 하르르 떨어지는 봄날 오후는 고요로 들끓고 마음은 심심했다. 무심과 평안 속에서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오늘 하루에게 말없이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한다. 잘 가라, 오늘이여. 봄밤에는 모든 이들에게 더 다정해지기로 한다. 까칠했던 마음도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고 싶다는 착한 생각을 하면서 누그러지는 것이다. 그 찰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데 그 미소는 오늘도 무사히 지났다고, 내일도 그렇게 지날 거라는 안도와 기대의 표현일 테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은 만개한 벚꽃을 더 볼 수 있는 날이 이어질 수 있도록 좋은 날씨이기를, 바보 이반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어리석은 누군가도 오늘보다 더 자주 웃으며 착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