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천댐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남한에서 최초로 건설을 시작했다. 대륙 침략을 위한 에너지원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1944년 10월 완공돼 발전소 1, 2호기에서 발전도 했다. 3, 4호기는 태평양전쟁으로 완공을 보지 못했으며 1945년 광복과 함께 화천댐은 공산 치하에 들어갔다. 이후 6·25전쟁 때 파괴되자 수복과 함께 1, 2호기를 복구하고 3, 4호기를 건설해 본래 기능을 회복했다. 화천댐은 최악의 전력난을 겪던 시기에 국내 전기 공급의 40%를 책임졌다. ▼6·25전쟁 당시 화천댐 탈환 전쟁은 치열했다. 1951년 공산군의 춘계대공세에 맞서 국군도 화력을 집중했다. 댐 취수구의 탄흔을 비롯해 안보 벙커, 옛 토담길이 대결전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화천발전소 경내에 발전소 탈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 발전소 직원들이 ‘탈환 전공비’를 세웠다. 전공비 높이는 2.23m로 아담하게 건립됐다. 탈환작전에 나선 6사단장을 비롯해 부사단장, 참모장, 연대장 등 유공자 이름을 새겨놨다. ▼화천댐을 배경으로 중공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는 ‘파로호 기념비’도 세웠다. 중공군을 섬멸한 대전과를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선까지 행차해 장병들을 격려하고 ‘파로호(破虜湖)’라는 석 자의 친필 휘호를 내렸다. 1955년 10월 6사단장 이창정 장군이 6·25전쟁사에 남을 파로호 전투와 이 대통령의 휘호를 보존하고자 6사단의 상징인 청성(靑星)마크와 함께 파로호 기념비를 건립했다. 대전과의 감격과 국군의 용맹성을 영세 보존하기 위해서다. ▼파로호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한 무명 학도병을 기리는 ‘조국과 자유 수호 전적비’는 1975년 설치됐다. 여기에는 학도병이 전우에게 남긴 “길손이여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우리는 겨레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곳에 누웠노라”라는 유언이 적혀 있다. 탑에 새겨진 ‘조국과 자유를 지킨 곳’ 9자의 한글 휘호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글씨다. 화천댐, 수력발전소, 파로호 일대에 역사 탐방로가 추진된다. 근대사의 아픔을 잠시나마 돌아볼 수 있는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