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정연수의 ‘탄광촌 기행’] 한국 산업화 이끈 치열한 삶의 현장 ‘막장’ 왜 난장판 용어로 쓰나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첨단산업+석탄문화 세계유산화’
(5)막장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동발을 메고 노보리를 오르는 광부. 사진=이희탁 중앙진폐재활협회장

노보리와 동발, 그리고 관광노보리=광부의 작업현장을 ‘막장’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리 캐내도 막혀 있는 작업장이다. 이곳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노보리’와 ‘동발’이다. 노보리(のぼり)는 경사진 면을 올라가는 갱도를 의미하는 일본어이고, 동발은 갱도가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는 기둥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탄맥을 따라가는 노보리 작업은 광부의 가혹한 노동 환경을 상징한다. 낮은 천장의 갱도에서는 광부들이 동발을 배 아래에 끼고 낮은 포복으로 노보리를 기어오르는 ‘배밀이 작업’도 있었다. 노보리는 허리를 숙여야만 통과할 수 있어서 개구멍이라고도 불렸다.

1980년대까지 한국의 대부분 탄광은 노보리 막장이었다. 막장의 갱도는 허리를 펴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기에 정부 관리나 언론 취재단이 방문할 때는 비교적 넓은 막장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을 ‘관광 노보리’라고 불렀다. 그곳을 보고도 많은 사람들은 막장이 험한 곳이라고 여겼으니, 실제로 광부들이 작업하는 곳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광부들은 ‘같은 막장에도 천당과 지옥이 따로 있다’고 말했는데, 통기시설이 좋거나 생산량이 많아 급여가 많은 곳은 천당이라 불렀다. 관광노보리가 바로 그런 곳이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지열이 높아지고, 높은 습도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탄가루를 흡입하지 않으려고 방진마스크까지 착용했으니, 숨쉬기 자체가 고역이었다. 광부들은 숨 쉬는 것만도 중노동이라고 하소연했다. ‘탄광에서 3일 농땡이면 3년 보약 먹은 것과 같다’거나, ‘굴속에 하루 안 들어가면 소고기 열 근보다 낫다’는 말은 그 열악한 환경을 잘 보여준다.

◇1985년 시찰 온 대한석탄공사 사장에게 막장 현황을 설명하는 광부. 사진=대한석탄공사

주부의 막장 견학이 중단된 사연=탄가루 묻은 얼굴과 작업복으로 퇴근하던 광부들이 깔끔한 복장으로 다니게 된 것은 1980년대 들어 설립한 중앙목욕탕 덕분이다. 광업소 목욕탕에서 목욕하면서 광부들의 출퇴근복이 깨끗해지자, 가정에서는 광부들의 노동 무게에 대한 무감각이 일어났다. 광업소는 아내들에게 막장 견학 기회를 제공하여 광부가 가정에서 존중받기를 기대했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 등에서는 사택 단위로 견학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곳은 ‘관광 노보리’로 불리던 막장이었지만, 아내들은 상상도 못한 열악한 작업 환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견학 후 아내들은 남편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반성했다. 아내 중에서 “막장이 그렇게 무서운 곳인지 몰랐다”면서 남편에게 퇴직을 종용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아내의 호소에 감동한 광부들이 대거 퇴직 신청을 하자, 숙련 광부 부족에 시달리던 광업소는 막장 견학을 중단해야 했다.

◇허리를 꺾은 등 위에 동발이 닿을 정도로 좁은 막장의 채탄광부. 사진=대한석탄공사

굴진 광부의 막장 교대=석탄 생산 공정은 굴진→채탄→운반→선탄으로 이어지는데, 막장은 굴진작업장과 채탄작업장에 위치한다. 대중들이 광부 이미지로 떠올리는 것은 채탄 광부이지만, 실제는 굴진 광부들이 더 높은 급여를 받는다. 석탄을 채굴하려면 굴진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 암벽을 뚫던 굴진 광부가 탄맥을 발견하면 채탄 광부에게 넘겨준다. 광업소는 1950~1980년대 증산이 시급하던 때, 모든 직종을 3교대를 운영하면서도 굴진은 4교대로 운영했다. 굴진 광부는 ‘막장 교대’라 하여, 다음 작업조가 현장에 도착해야 작업을 멈출 수 있었다. 국가에서는 ‘고속굴진’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경쟁을 부추겼다. 1961년 도계광업소가 12월 한 달 동안 423m 굴진 기록을 세웠는데, 1963년 장성광업소는 5월 한 달 동안 680m 기록을 세웠다. 함백광업소는 그해 10월 한 달 동안 731m를 굴진하면서 자유국가 진영의 세계기록인 702m(남아연방)를 훌쩍 넘어섰다.

‘막장’의 왜곡된 의미=갱내 사고가 발생하면 같은 막장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동시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기에, ‘한 막장은 한 제삿날’이라는 말이 생겼다. 막장 동료는 부모·형제보다 더 가까운 존재로 여겼다. 목숨을 걸고 석탄을 캐는 작업현장인 ‘막장’이란 단어가 언젠가부터 드라마의 불륜이나 파국적 상황을 뜻하는 단어로 변질되고 있다. 막장을 지켜온 광부들은 이런 부정적 의미의 사용에 화가 난다고 한다. ‘난장판’이나 ‘끝판’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왜 숭고한 작업장인 ‘막장’을 부정적 상황에 쓰느냐는 것이다.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경제적 소외층으로서 막장을 선택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 일어섰다. ‘막장 인생’이란 의미를 캄캄한 삶의 막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배수진의 용기로 삼았다. ‘인생 막장’을 ‘탄광 막장’으로 바꾸면서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했다. 광부들이 온몸으로 석탄을 캐던 ‘막장’의 숭고한 의미를 결코 훼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피플&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