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사설]강릉·고성 산불 이재민들, 아물지 않는 트라우마

“산불은 꺼졌지만 내 삶은 아직 타오르고 있다.” 강릉과 고성의 산불 피해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다. 화마(火魔)가 지나간 지 수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일상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집을 잃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재민들의 상처는 물리적 복구만으로는 아물지 않는다. 심리적 외상, 생계 불안, 제도적 한계가 삼중고로 얽히며 이들의 삶을 계속 짓누르고 있다.

지난해 4월 강릉시 난곡동에서 시작된 산불은 경포동 일대까지 번지며 산림 120.7㏊를 태우고 274가구 551명의 보금자리를 순식간에 앗아갔다.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24년 3월 말 기준으로도 129세대 273명이 임시주택 또는 임대주택에 머무르고 있다. 재해 직후의 응급 지원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의 관심은 빠르게 식었고 이재민 지원은 사실상 지자체에 떠넘겨졌다. 복구는커녕 일상회복조차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다. 2019년 강원도 고성의 사례도 다르지 않다. 당시 화재 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사람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으며 여전히 약을 복용 중이다.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는 진단만 반복되다 결국 수년이 지나서야 ‘정신적 외상’이라는 실체가 확인됐다. 문제는 이 같은 트라우마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며 적절한 치료나 제도적 보완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산불 피해자 다수는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고립, 정신적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음에도 현행 제도는 초기 재난 대응에만 초점을 맞추고 장기적 회복에는 무관심하다. 지방자치단체가 자체 조례 제정을 통해 지속적인 지원책을 마련하려 해도 관련 상위법이 없어 실현 가능성은 낮다.

강원도는 전국에서 가장 넓은 산림을 보유한 ‘산림수도’인 만큼 산불 발생 위험도 가장 높은 지역이다. 그만큼 피해자 지원 체계 또한 전국적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정비돼야 한다. 정부는 ‘재난 직후 지원’에 머무르지 말고 장기적 관점에서 피해자들의 주거 안정과 심리 치료, 생계 재건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재정적 틀을 마련해야 할 때다. 더불어 산불 피해 지역에 대한 중장기 복구 계획 역시 재정비가 필요하다. 임시주택이 ‘영구 주거지’가 되지 않도록 공공임대주택 확대와 주택 재건을 위한 금융지원 제도가 시급히 구축돼야 한다. 정신 건강 회복을 위한 전문 인력 배치와 심리 상담 체계 또한 병행돼야 한다. 산불은 물리적 자산만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삶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심리적 재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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