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월요칼럼]오늘의 노인 단상

김흥술 전 오죽헌시립박물관장

아프리카 속담에 ‘죽어가는 노인은 불타고 있는 도서관과 같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노인은 그가 살아온 시대이며, 그 시대의 살아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의 지적 역량과 경험, 인품과는 별개로 노인은 그 자체로 사회의 보물과 같은 존재이다.

이제 몇십년 지나면 20세기 전반부를 살았던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다. 기록이나 자료로 그 시대를 알 수 있겠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생생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게 된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서 보듯이 노인은 그 자체로 역사의 타임캡슐인 것이다

우리 시대의 노인은 보통 태어나면서 식민지 백성이었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고, 산업역군으로 포장된 일꾼이었다. 그런 노고 속에서 한 끼 양식에 감사하며 살았다. 그렇게 살아온 삶에서 길들여지고, 체화된 근성으로 비판력을 잃기도 하지만, 그 각각은 하나의 역사이다. 그런 면에서 노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우와 인식이 성숙하지 못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

모든 어린이가 제대로 훈육되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인은 존경받고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이를 제대로 해내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노인 스스로도 젊은 세대와 불화하기도 한다.

사람은 나이들어가면서 현명해지기보다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시골마을 대소사에서도 바쁜 일상 때문에 의견 교환과 소통을 통한 의사결정이 아니라, 어른의 생각에 따라 토론과정 없이 밀고 가는 일이 더러 있다. 이른바 나이 든 사람은 아무때나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얼마간 있다. 조금 실수해도 어른이니까, 노인이니까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이가 귀담아들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하는 얘기니까 그냥 들어’ 하는 식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른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은 ‘욕심’인 경우도 더러 있다.

초고령화 사회라 불리는 우리 주변에는 공·사립 노인복지 시설이 많다. 얼마 전, 강릉 시내의 한 노인주간보호센터에 자원봉사 활동을 갔었다. 몸이 불편한 30여명 정도의 노인이 주간에 모이는 시설이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처럼 ‘노치원’이라 불리는 복지시설이다. 그 곳의 노인들은 오전에는 원장 선생님을 따라 앉은 채로 발끝부터 머리까지 몸을 골고루 터치하는 이른바 ‘치매 예방체조’ 같은 것을 하고, 오후에는 초빙강사가 와서 노래교실 같은 율동과 놀이, 그리고 오후 3시경 동요와 율동으로 일과를 마무리한다. 대략 그런 과정에서 경우에 따라 목욕돌봄 등 각 노인의 사정에 따라 필요한 돌봄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었다.

평균 90세에 이르고 식사와 배설 활동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고, 다양한 병증의 치매환자도 많았다. 처음엔 생기없는 노인들을 보며 ‘우울’이 엄습해 오는 느낌이었다. 노인과의 대화는 제대로 된 대화도 아니었고,처음 해 본 수발은 꽤나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첫 날 나의 어색함과 불편함은 둘째 날에는 좀 달랐다. 노인들이 어눌한 말투로 간간이 풀어내는 삶을 들으며 지금 내 옆에 앉아 계신 이 노인의 모습이 ‘우울’이 아니라 한 세기를 굳건하게 살아온 당당한 모습, 그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어른이다. 아름답게 늙는 것은 노인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1인 가구가 많고 한 집에 살지는 않지만, 누구나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어른과 산다. 어른은 동구 밖에 서 있는 오래된 당산나무 같은 존재이다. 여름엔 동네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새들이 날아와 쉬게 한다. 크고 넓은 포용 그리고 연륜이 묻어나는 사람, 그런 존재를 우리는 어른이라고 한다. ‘노인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잘 만들어 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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