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대중매체 속 실록이야기 ③영화 ‘사도’(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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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영조의 기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1월 25일 기사 내용.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사도’는 조선 21대 왕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 이선(1735~1762)을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아사(餓死·굶어 죽음)시킨 임오년(1762년)의 사건, ‘임오화변(壬午禍變)’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영화적 상상력이 아닌, 정사와 야사(한중록)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지만, 오히려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 더 영화같아서 비극적으로 다가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조는 마흔둘에 낳아 애지중지 하며 키우던 자신의 아들을 엽기적인 방법으로 살해한 것일까. 죽음에 대한 원인을 두고 사도세자가 치열한 당쟁의 희생양이었다는 분석과 함께 ‘탕평책’으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던 영조와 개혁적인 사도세자 간에 벌어진 정치투쟁의 결과라는 견해 등이 상존한다. 물론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날로 심해지고 그로인한 기행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히기는 한다. 하지만 정황상 재위 기간내내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영조의 결벽증이 아들에 대한 높은 기대치로 발현되면서 상상도 못할 희대의 비극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합리적일 듯 싶다. 물론 “왕권유지를 위한 결단”이라는 표현으로 퉁치는 분위기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영화 ‘사도’ 스틸컷.

영화에서는 아주 짧은 분량이지만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경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도세자(유아인)를 데리고 종묘를 방문한 영조(송강호)가 ‘왕가에서 자식을 원수처럼 기른다’는 뜻에 대해 설명하며 “사람들은 내가 형님을 죽이고 왕이 됐다고 한다. 넌 어찌 생각하느냐?”라고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그 것. 이는 영조가 이복형 경종을 죽였다는 소문, 이른바 ‘경종독살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경종실록에도 그 내용이 담겨있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고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 하여…(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 8월 21일)” 이처럼 병을 앓던 경종에게 상극인 게장과 생감을 먹게하고, 어의의 의견과 배치되는 약을 처방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이 당시 왕세제인 연잉군, 즉 영조라는 음모론은 집권 내내 그를 괴롭히게 된다. 영화 속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이 곳에는 형제와 조카까지 죽이고 종사를 지킨 임금들도 계시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경종을 자신이 죽였다는 고백일 수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암시일 수도 있어 섬뜩하게 다가온다.

◇영화 ‘사도’ 스틸컷.

1735년 1월,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것에 대해 상당히 기뻐했다. 영조의 첫 아들인 효장세자(1719~1728)가 요절하고 7년만에 태어난 아들이니 말그대로 ‘금지옥엽’처럼 여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록에서 영조는 증조할아버지 효종, 할아버지 현종, 아버지 숙종(삼종)을 언급하며 대를 잇게 된 기쁨을 나타내기도 했다. “삼종(三宗)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중략)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1월 21일)” 실록에서는 사도세자가 태어나고 며칠이 지난 후, 좀더 솔직한 영조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기쁨보다는 비로소 대를 이을 수 있게 됐다는 안도의 감정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얼마나 소중 자손이었겠는가. “내 나이 점점 늙어가니 선조의 대통(大統)을 전할 데가 없음이 두려웠었다. (중략)대개 나라의 존망과 성쇠의 판가름이 이 순간에 닥쳤는데, 천지와 사직의 신령이 이와같은 아들을 내려줌을 힘입었다.(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1월 25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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