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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칼럼]금강산 찾아가자 1만2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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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어릴 때 흥얼거리던 노래가 아직도 입가에 맴돈다. 아이에게도 알려져서 찾아가고 싶던 금강산, 조선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불교의 성지이며,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 중의 하나로 여겼다. 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기이하여 항상 유람하기를 소망하였다. 외국인들도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동경하였을 정도였다.

금강산 유람은 양반 사대부들의 차지였다. 그들은 여행기를 작성하였고 아름다운 경치에서 느끼는 흥취를 한시로 노래했다. 가사로 짓기도 했고 시조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금강산 때문에 인근 지역에 발령을 원하기도 하였다. 중앙 관리들도 금강산의 유람에 동참했다. 예조판서였던 이정귀는 공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유점사를 거쳐 내산과 외산을 유람하였다. 벼슬에 아직 나가지 못한 이들도 유람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명문가 출신인 정란(1725~1791)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산악인으로 기록된다. 30세부터 유람을 시작한 그는 조선 땅을 발로 누비며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오고 갔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강세황, 김홍도 등과 교유하였는데, 금강산을 같이 등반한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기술직 중인 출신도 유람 대열에 합류하였다. 「금강유기」를 쓴 함진숭은 기존의 여행기를 답습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기존의 구분을 따르지 않고, ‘신계금강’이라는 별도의 구역을 제안함으로써 금강산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였다.

화가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정선은 1711년과 1712년, 그리고 노년에 접어든 1747년 금강산 유람을 바탕으로 화첩을 남겼다. 그의 금강산 그림은 실경산수화의 전환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강세황은 그림뿐만 아니라 여행기도 남겼다. 「유금강산기」에는 김홍도를 금강산에서 만난 기록이 남아있다. 김홍도는 김응환과 1788년에 금강산을 그려오라는 정조의 명을 받고 그림 여행 중이었다. 조선의 화가들은 금강산에서 조선의 실경을 그려내었다.

금강산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성들은 외출을 금하는 사회적 규율이 더해져 금강산에 가보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황진이는 금강산이 천하제일의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이생을 설득해 함께 떠난다는 내용이 『어우야담』에 실렸다. 제주 기녀 김만덕(1739~1812)의 유람은 유명하여 『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였다. 19세기를 살았던 김금원(1817∼1850)은 「호동서락기」를 남겼다. 남장을 하고 금강산의 빼어난 풍경을 구경한 뒤 관동팔경, 설악산, 한양을 둘러보고 나서야 여정을 마쳤다.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외국 사신들은 사행 중에 조선의 명승을 유람하고자 했다. 태종 시절부터 금강산 유람 요청을 꾸준히 했다. 명나라 사신의 유람 기록은 역사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사신의 유람은 명나라에 비해 적었으나, 그들도 머무르는 동안에 금강산을 다녀왔다. 문계(文溪)는 가을에 유람하고 기록을 남겼다.

조선에 들어오면서 전 국민이 금강산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내외국인의 구분도 없었다. 강원도의 명산인 금강산은 외국인에게도 핫 플레이스였으며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최근에 금강산 가는 길인 남북 연결도로가 끊겼다. 다시 이어져서 선인들처럼 유람하게 될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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