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청봉]“그래도 지구는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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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기 문화교육담당 부국장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억지춘향으로 일본과 친해지는 중이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일본을 향한 정부의 정성이, 기조가 그렇다. 그런데 체면을 구기는 일이 여럿 벌어지고 있다. 강제동원 해법을 발표하며 “일본이 나머지 물컵의 절반을 채울 것”이라는 호언장담은 윤정부 임기 절반을 지났는데도 달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중동하며 묵묵부답인 일본의 태도를 보며 누군가는 그들이 이미 물컵을 걷어 차 산산조각 내버렸다고 말한다. 라인야후 사태에 이어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인 일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드러난 우리 정부의 ‘무념무상’ 하는 경지를 목도한 후에는 스스로 수사(修辭)의 한계에 봉착한다. 참으로 기묘하고 기괴하면서 섬뜩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딱 여기까지가 내 표현의 한계다. 일본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와 관련해 대통령실이 내놓은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는 해괴한 말 앞에서는 실소가 절로 흐른다. 이를 본 일본 언론들 조차 이례적이라고 했다는 평가를 듣고는 스멀대는 창피함에 얼굴을 감싸쥔다.

마치 일제를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 요즘이다. 지난 15일 79주기 광복절의 날이 밝기도 전에 TV에 기모노 입은 배우들과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흐르는 ‘나비부인’이 방영됐고 바로 그 전날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찬양하는 영상이 상영됐다. 군(軍)의 정신교육 교재에서 홍범도, 김좌진 장군과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이름까지 삭제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여당의 한 대변인은 김좌진 장군이 공산세력과 연계 됐을 것이라는 취지의 말로 주변을 아연실색케 했다. 어디 그 뿐인가.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 김구(1876~1949)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책까지 발행, 판매되고 있으니 그 우연이 참으로 공교롭기 그지없다. 일제강점기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산 우리의 국민을 일본 국적을 지닌 일본 국민이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태도와 생각의 횡행, 이러한 논리를 기반으로 강제성을 부인하는 일본 정부의 억지를 신앙처럼 따르는 이들의 말쓰레기가 넘실대는 세태가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의 거리낌 없음이다.

영국 BBC가 제작한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가 제기한 소송으로 인해 홀로코스트의 존재 증명에 나선 한 역사학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최근 우리의 상황과 너무도 닮아 있어 하릴없이 빠져들어서 보게 된 영화다. 일제가 자행한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에서 강제성을 삭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친일 식민사관에 경도된 세력의 억지에 대해 오직 ‘사실’ 하나로 맞서야 하는 이들의 고군분투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의 증거를 가져와 보라는 말 앞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증명해 내야 하는 주인공과 변호인단의 노력은 독립운동이 부정당하는, 가상 세계와 같은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 내팽개쳐진 우리 국민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문제는 ‘아름다운 일본’을 널리 알리는데 몰두하는, 수정주의적 민족주의 신조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에 끊임없이 호혜의 제스쳐를 보내고 있는 우리 정부다. 영화는 결국 사실이, 진실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판결은 이랬다. “역사적 사실 날조는 고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사상적 믿음에 기초해 역사적 증거를 왜곡하고 조작해서라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고 보여진다. 고로 진실의 항변은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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