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올림픽이 한창이다. 우리 선수단은 금메달 11개(7일 현재)로 전체 6위를 달리며 선전하고 있다. 올림픽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종목은 마라톤.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서는 마라톤 출전권을 따낸 선수가 없어서 우리 선수들 역주를 볼 수 없을 듯 하다. 올림픽에서 마라톤 출전을 못하는 것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48년 만에 처음이다. 우리들의 추억 속에 남은 삼척 황영조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을 추억해 본다.
1992년 8월9일. 제25회 바로셀로나 올림픽의 마지막 날. ‘죽음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몬주익(Montjuic) 언덕을 스물두살 대한민국의 청년, 황영조(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 선수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뛰어 오르고 있었다. 39~40km 지점, 레이스 내내 엎치락 뒤치락하던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를 따돌린 그는 속도를 올리며 격차를 벌렸다. 거의 동시에 “이 언덕에서 기선을 잡아야 한다”며 TV중계진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스피드에서 뛰어난 모리시타 선수를 완전히 따돌리기 위해서는 언덕을 공략해야 한다. 황영조 선수가 레이스를 잘하고 있다”는 칭찬의 말들이 이어졌고, 레이스를 지켜 보던 한 아나운서는 그의 놀라운 스퍼트에 ‘강원도 주문진의 (산소)탱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드디어 메인스타디움으로 들어선 황영조 선수. 새로운 육상영웅의 등장을 기다리던 관중들은 환호성으로 그를 맞이했다. 황영조는 레이스 중 처음으로 뒤를 한번 힐끔한 후 승리를 확신한 듯 오른 팔을 들어 올리면 뜨거운 환호에 답했다. 이번에는 양 손을 불끈 쥔 채, 결승선을 통과한 그는 그대로 바닥에 미끄지듯 쓰러졌다. 그의 기록은 2시간 13분 23초.

이 감격스러운 장면을 숨죽여 지켜 보던 이가 있었으니, 주인공은 바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었다. 1936년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낸 그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이번 만큼은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다. 공교롭게 자신이 금메달을 딴 8월9일 그날이었다. 정확히 56년만의 쾌거였다. 신문 타이틀은 일제히 ‘황영조 올림픽 제패’였다, 그리고 부제로 ‘사상 첫 태극기 달고 금’, ‘통한의 그날 금’, ‘손기정 영광 56년 만에 재현’ 등 황영조 선수와 손기정 옹의 역사적 순간을 기념했다. 황영조 선수는 그야말로 국민적인 스타가 됐다. 1992년 8월12일 서울에서 진행된 카퍼레이드에서 눈길은 단연 황영조 선수에게 쏠렸다. 이어 춘천에서도 진행된 도민환영 행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올림픽 영웅의 등장을 축하하는 축제의 장이 됐다. 황영조 선수의 올림픽 제패를 기념하는 ‘삼척 황영조국제마라톤’대회가 삼척시와 강원일보 주최로 그의 고향 삼척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한편 황영조 선수는 2년 후인 1994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12회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고국에 안기며 마라톤 영웅으로서 건재를 과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