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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칼럼]김시습, 강원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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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다섯 살 된 아이가 폭설 속에서 부처의 도움으로 살아남아서 ‘오세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전설은 소설가에게 영감을 주어 창작 동화 ‘오세암’이 탄생했다. 또한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변주될지 모를 일이다. 조선 시대 문인들은 오세암이라 불리게 된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았다. ‘오세동자’인 김시습이 이곳에서 거처하였기 때문에 오세암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김시습처럼 다양하게 평가된 이는 없을 것이다. 조선 팔도를 유람한 천재 시인으로 각인되었다.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하며, 선비 출신이면서 승려가 되어 기행을 벌인 방외인이라고 한다. 농민의 고통을 대변한 저항의 시인으로, 기일원론을 주창한 성리학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성의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한문 소설집 '금오신화'를 지은 소설가로도 알려진 그는 세종 17년인 1435년에 태어났다. 천재라고 소문이 나자 다섯 살 때 영의정이 찾아왔다. 늙을 노(老)자로 시구를 지어보라 하였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老木開花心不老)’라고 읊었다. 후에 세종대왕도 김시습을 시험하고 비단을 내리며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고 ‘오세동자’라 부르게 했다.

과거 공부를 위해 삼각산으로 들어간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방랑길에 나섰다. 가치가 전도된 세상에서 왕도정치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의 발길은 철원에 닿았다. 세조 정권이 싫어 서울을 떠난 박계손 등이 초막을 짓고 은거하고 있었다. 김시습은 이들과 함께 은거하면서 시대를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여섯 신하가 죽고 단종도 사약을 받았다. 김시습은 분노가 치밀자 다시 강원도를 찾았다. 1460년에 여주를 거쳐 원주 동화사에서 「동화사에서 묵으며」를 남기고, 치악산을 넘어 횡성 각림사에서 하루를 보냈다. 관동대로를 따라 걷다가 지은 '방림역', '대화역'엔 그의 고독과 한이 배어있다. 골짜기가 깊고 나무가 울창하여 속세 사람이 드물게 오는 곳은 오대산이 으뜸이라고 꼽으며,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성종 14년인 1483년, 다시 강원도로 향했다. 춘천 청평사로 들어오면서 시를 읊조렸다. “나그네 청평사에서, 봄 산 경치 즐기나니......시 흥얼대며 선동에 들어서니,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근심 걱정” 봄날 청평사를 찾은 김시습은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변화되었다. 나물과 버섯의 맛과 향기를 느끼면서 절로 흥얼거렸다. 가슴속에 맺혀있던 고독과 분노, 근심과 회한은 사라진 것일까?

청평사에 머물던 그는 설악산 오세암을 거쳐 양양으로 향했다. 노년의 산속 생활은 바람과 의 생활이었다. 따뜻한 봄날에 흐르는 구름을 보면서 다시 유랑을 생각했다.

김시습의 생애는 도가 실현될 수 없는 세상을 횡단하며 현실과 계속 어긋났다. 불의한 세상에 분노가 일면 조선 팔도를 유람했는데, 강원도를 자주 찾았다. 발길이 안 닿은 곳 없었고, 곳곳에 시를 남겼다. 특히 철원, 화천, 춘천, 오대산, 설악산, 양양에 잠시 은거하며 시름을 달랬다. 강원도의 축복이다. 우울한 조선의 천재에게 강원도 산수는 치유를 선물했다. 힐링의 강원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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