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배우면서 나라 지킨다…군대 뺨치던 학생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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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후 미군정 불안정한 시대에 잉태
전국 곳곳 남녀 불문 중학교 이상 호국단 결성
"조국 방위에 결사 헌신" 단기 군사훈련도 받아
정치적 목적 속 정권 전위대 같은 역할 하기도
위세 떨치다 1985년 폐지, 총학생회가 대신 자리

◇1978년 춘천에서 진행된 건국 30주년을 기념해 열린 학도호국단 연합악대의 행진대회 모습. 강원일보 DB.

그때 그 시절, 대한민국 학생들은 할 일이 참 많기도 했다. 온갖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매스게임에 동원(본보 2월1일자 22면 보도)됐어야 했고, 새마을 운동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새벽에 일어나 마을 청소에 끌려(?) 나가야 하는 등의 일을 일상다반사로 겪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의 고생은 애교로 봐줄 조직이 우리에게는 있었으니,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이 바로 그것이다. 사전적으로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결성된 학생 단체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1945년 광복과 미군정(1945~1948년)으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잉태된 이 단체는 1949년에 공식 출범한다. ‘학도호국단’ 구성의 중심에는 문교부(현 교육부)와 국방부가 있었는데, 교육과 국토방위를 뒤섞은 이상한 협업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엄혹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학생들을 군조직의 하부 구성에 편입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분명 논쟁의 소지가 있는 조직임에는 틀림없었다. 특히 정권의 안위를 위해 학생까지 정치적 도구로 동원하고 이용한 행태는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다.

1949년에 접어들면서 ‘학도호국단조직요령’ 공포와 함께 전국 곳곳에서는 지역별 학도호국단 결성식이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남녀를 불문하고 중학교 이상의 각 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이 설치됐고, 호국단 간부들은 단기 군사훈련까지 받았다. 지역 조직 구성이 마무리된 후, 그해 4월22일 서울운동장에서는 ‘중앙학도호국단’ 결성식이 열리게 되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4만명의 각 지역·학교 대표가 운집한 가운데 이범석 국무총리와 신익희국회의장, 단장을 맡게 된 안호상 문교부 장관을 비롯한 각 부 장관들은 물론이고, 미국대사까지 참석해 축사에 나섰다. 이날 학도대표 남상진씨가 선서문을 낭독했는데, 그 내용이 살벌(?)했다. 마치 전쟁을 앞둔 것 같은, 호전적인 표현이 넘실댔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화랑도의 기백과 숭고한 3·1정신을 계승 발휘해 반민족적 행동과 반국가적 상을 철저히 부셔 국토통일과 조국방위에 결사 헌신하겠다.” 게다가 결성식 폐회 이후 시가행진을 하는가 하면, 군인들이 하는 분열식(부대나 차량 따위가 대형을 갖추어 사열단 앞을 행진하면서 경례하는 의식)까지 진행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978년 춘천에서 진행된 건국 30주년을 기념해 열린 학도호국단 연합악대의 행진대회 모습. 강원일보 DB.

1949년 2월에 결성된 영월중 학도호국단의 경우 단원 300여명이 영월군 내 각 마을로 흩어져 주기적으로 청소를 진행했다는 기사(경향신문 1949년 4월6일자 기사)가 남아있어, 1970년대 벌어진 새마을 운동 같은 활동을 20년이나 앞서 실행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 같은 학생들의 선행에 자극받아 직장호국단, 부녀호국단까지 등장했다는 홍보성 기사들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권 차원에서 학도호국단을 띄우기 위해 부단히 애쓴 모습들은 당시 신문기사 등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국의 학도호국단 조직의 결속을 위해 중앙학도호국단이 주관하는 전국 체육대회가 열리고, 심지어 지역 중·고교 호국단이 직장 친선배구대회를 주최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으니 당시 대단한 위세를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적 목적 속에서 태어나 정권의 전위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학도호국단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폐지된다.

이듬해 5·16군사정변 이후 조직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산하기관 재건국민운동본부는 학도호국단의 역할을 대신할 학생자치조직 ‘재건학생회’의 구성과 발족을 주도한다. ‘능동적인 학생활동’을 강조했지만, 1961년 11월을 ‘학생단합의 달’로 만들고 학생총궐기 운동을 체계적으로 준비·진행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학생들을 통제와 이용의 대상으로 여겨 손아귀에 쥐고 있으려는 의도를 다분히 품고 있었다. 그렇게 사라졌던 학도호국단은 1975년에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낸다. 1975년에 전국 98개 대학 총장회의에서 학도호국단 재창설이 논의됐고, 그 해 9월 중앙학도호국단이 창설되면서 완벽하게 부활한다. “배우면서 나라를 지킨다”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불과 15년 만에 부활된 학도호국단은 대학을 지키고 국가를 수호해 나가야 한다는 해괴한 말잔치 속에 활동을 재개한다.1972년 유신 선포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유신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안보 이슈를 부각하면서 학도호국단의 부활이 진행됐다. 특히 ‘긴급조치 제9호’ 선포 등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고등학교 이상의 학생과 교직원들로 학도호국단이 구성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도호국단은 거의 군사조직처럼 운영됐다. 1969년부터 일반 학생들에게 시작된 군사 교육훈련 과목인 ‘교련’이 더욱 강화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학도호국단 부활이 학생의 군인만들기 완성판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위세를 떨치던 학도호국단도 1985년 폐지된다. 학교별로 총학생회, 학생자치회가 학도호국단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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