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대장금(大長今). 드라마 속 대장금은 온갖 역경을 딛고 궁궐에 들어가 궁중 최고의 요리사가 된데 이어, 임금의 주치의인 어의녀(御醫女) 자리에 까지 오른 불세출의 인물로 묘사된다. 전반적인 설정을 보면 언뜻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 낸 것 처럼 보이지만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많은 부분 더해지긴 했지만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중종이 대장금에게 엄청난 신뢰를 보냈다는 점이다.
의녀 장금, 대장금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515년(중종 10년) 3월21일이다. 사헌부가 나서 대장금에게 어떠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러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보고하는 상황이 그것이다. 중종이 이르기를 사람의 삶과 죽음이 의술과 약에 관계 되겠는가 반문하며, 대왕전에 약을 실수로 올린 자에 대해 죄를 묻는 것은 이전에 사례가 있지만, 그것이 왕후에게도 적용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어 의녀 장금이 출산에 도움을 줘 상을 내려야 하지만 대고(大故·큰 사고)가 발생해 상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상을 주지는 못할 지언정 형장을 가할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윤허(允許·임금이 신하의 청을 허락함)하지 않는다.(중종실록 21권, 중종 10년 3월 21일)

신하들은 이튿날에도 대장금에게 다시 한번 벌을 내려야 한다고 진언한다. 신하들은 “의녀인 장금의 죄는 하종해(조선 중기 어의)보다 훨씬 심합니다. 산후에 옷을 갈아 입을 때 중지시켰다면 어찌 그러한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형조에서 죄의 경중을 따져 형량을 정했는데 이를 적용하지 않고 장형을 면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라며 중종이 내린 결정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중종은 대장금에게 벌을 줘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청을 모두 거절해 버린다.(중종실록 21권, 중종 10년 3월 22일)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졌기에 이처럼 대장금에 대한 신하들의 처벌 요청에 쇄도 했을까. 바로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1491~1515)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고 신하들은 믿었기 때문이다. 장경왕후는 1515년 2월25일 밤에 원자(인종)를 출산하지만, 산후병으로 인해 스물 넷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은 실록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중종은 장경왕후의 병세가 위급해 병을 피해 궁궐 밖으로 거처를 옮기려고 하는데, 자신의 거처를 옮기는 것은 어떤지에 대해 자문을 구한다. 하지만 승정원에서는 병의 증세가 산후에 발생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불가함을 알린다.(중종실록 21권, 중종 10년 3월 1일) 결국 장경왕후는 3월2일 숨을 거둔다. 실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중종이 승정원에 장례 준비를 지시하자 신하들은 “신들도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매우 당황해 했다.(중종실록 21권, 중종 10년 3월 2일) 장경왕후의 죽음이 산후 엿새만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당시 출산을 도운 어의나 의녀들에게 책임의 화살이 쏟아진 것이다. 그 가운데 한명이 바로 대장금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