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위주의적인 조직문화에 대한 성찰이 생태에 대한 관심의 출발이었어요.” 첫 여성 법무부 장관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뒤로하고 강금실 강원문화재단 이사장이 환경운동가로 나서게 된 이유다. 그가 책 ‘지구를 위한 변론(김영사 刊)’을 펴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지구와 사람’ 사무실을 찾았다.
인간 중심의 현재의 법체계
생태위기 막지 못하고 악화
수직적 권위주의 권력에 고민
환경문제에 관심 갖게 돼
강원문화재단 활동 20개월
온·오프라인 문화 강화 집중
기초단체재단 네트워크 기여
송풍기로 낙엽을 청소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뒷길, 소란한 사람들을 지나쳐 조용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곧 ‘유재(留齋)’라고 이름 붙은 한옥이 나타났다. 추사 김정희가 제자에게 지어준 호라고 했다.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겨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복을 다하지 않고 남겨 자손에게 돌려주라는 뜻이다. 무거운 의미를 가진 현판을 지나쳐 유재에 들어서니 강금실 이사장이 녹색 정장을 입고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그를 만나 책 이야기와 환경의 소중한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돈된 소비생활이 첫 단추=책 ‘지구를 위한 변론’에는 강 이사장의 생태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책을 읽으니 인간 중심에서 지구 중심 사고로 바뀌어야 할 시기라는 것은 이해됐다. 어떻게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건지가 궁금했다. 지구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냐는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가지런한 삶이 첫 단추’라는 답이 돌아왔다. 소비생활 자체에 정돈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강 이사장은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거나 플라스틱을 줄이는 등의 실천은 많이 하고 계신다. 그런데 소비가 너무 일상화돼 있어서 자신에게 어떤 물건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채 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집에 있는데 없는 줄 알고 같은 물건을 또 산 적이 없냐고 도리어 질문했다. 환경을 생각한다면서 ‘에코백’이 집에 넘치고 있지는 않는지도 덧붙였다. 뜨끔했다. 그는 “친환경을 고려하는 소비에 앞선 단계에서 자신의 소비생활을 통제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며 “아름답고 멋있게 살되 낭비를 줄이자는 것이다. 실컷 써도 된다는 생각이 쌓여 기후·생태 위기가 왔다”는 소신을 밝혔다.
■권력 패러다임에 대한 성찰=강 이사장은 법무부 장관을 했던 이가 어째서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핵심은 권력 중심 문화에 대한 성찰이었다. 그는 첫 여성 로펌 대표·법무부 장관·서울시장 후보 등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왔다.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걸으면서도 수직적인 조직문화에 대해 고민했다고 했다. 강원문화재단 이사장 취임 후 첫 이사회에서 권위적인 이사회 형태를 탈피하자고 말했던 것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2008년 가톨릭대 생명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강 이사장의 성찰이 근대문명의 비판과 생태공부로 이어졌다.
그는 이제 생명과 지구라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본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뜻이 맞는 몇 명과 함께 생명문화포럼이라는 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2015년에 이르러 지구법학회가 결성됐고, 그해 지식공동체 ‘지구와 사람’을 창립, 대표를 맡게 됐다. 지구와 사람은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공동대표만 10명에 달한다.
강 이사장은 “지구법학의 이해를 위한 단계를 넘어 구체적인 각론을 펼칠 시기”라고 밝혔다. 지구법학의 핵심은 하늘과 나무, 강에도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 현재의 법 체계가 산업문명이 초래한 생태위기를 막지 못하고 도리어 확산하는 데 일조했다는 데에서 출발했다. 권리주체에 인간만을 놓는 것을 넘어 지구상의 생명체계로 범주를 넓히자는 것이 요지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사실 강 이사장을 처음 만난 건 강원일보사가 주최한 '2019 강원여성정치지도자과정' 강의를 통해서다. ‘최초의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온 경험이 담긴 강의였다. 책에는 ‘에코페미니즘’에 대해 소개하는 부분이 등장했다. 여성계에서 많이 보던 단어였다. 설명을 부탁했다.
강 이사장은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을 연결시켜 생태적이고 평등한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최근에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된 것이 산업문명이 지나치게 자연을 수탈했기 때문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세상을 어떻게 평등하게 만들 것이냐의 관점에서 지역균형, 성평등 문제도 중요한데 이제는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봐야 하는 시대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이제 지구, 자연이라는 범주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의 답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강원문화의 네트워크를 더욱 견고히=그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강원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하고서 20개월이 지났다. 남은 과제가 많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가 끝난다고 해도 온라인 문화가 계속될 것이기에 재단은 온·오프라인 문화를 어떻게 함께 잘 만들어 가느냐 하는 부분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강 이사장은 또 “도내 기초단체 문화재단이 15개가 있는 만큼 강원문화재단이 광역 재단으로서 기능을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 기초단체 재단의 네트워크에도 기여할 것이며 이 재단들의 지원사업과도 겹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초단체 재단이 맡은 역할과 다른 차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재정비하는 방향을 고민 중이라는 것이다.
그는 “평창대관령음악제, 강원국제트리엔날레 같은 도 대표 예술제를 더 잘 키워낼 것”이라며 “이외에도 평창평화포럼이나 정선포럼 등 도 차원 문화행사에 재단이 유기적으로 결합, 중심 역할을 강화하고 2024 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이 문화올림픽으로 치러질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 안의 행복을 찾아가는 길=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책 가운데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문구가 인상 깊었다고 이야기를 건넸다. 강 이사장이 깜짝 놀랐다. 그 말이 하고 싶었던 말이란다.
그는 “우주와 내가 어떻게 연결된 존재인지 들여다보면 삶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내가 우주에 하나라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환경 문제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할 때 이를 상기시켜야 한다. 그러면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태어난 존재가 다 굉장한 것이라고 눈을 뜨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나와 맞지 않는 걸 하려고 하면 스트레스가 온다. 내 방식을 찾아서 자유롭게 살면 된다”고 말했다.
이날 그는 책 세 권을 건넸다. 줄이는 삶, 정돈된 삶을 시작해볼까 했는데 짐이 늘었다. 그는 “에코백 10개가 있는데 3개만 필요하면 나머지는 나눠라. 필요한 이는 받으면 기뻐하고 넘치면 또 나눌 것”이라는 말을 했다. ‘유재’를 지나쳐 나오면서, 싹싹 쓸어내듯 쓰지 말고 여유를 두라는 뜻의 이 공간이 강 이사장과 잘 어울렸다.
이현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