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두새벽 서울서 출발한 150여명 도착
스테프들 오전 7시부터 촬영준비 분주
여름배경 탓 얇은 의상에 하필 강추위
정오쯤 슬슬 지쳐 촬영중간 쉬기 바빠
오후 6시께 다함께 박수치며 촬영 마쳐
영화의 메시지에 큰 영향 끼치지 않아
이제껏 신경 안썼지만 다시 생각하게 돼
콘텐츠는 역시 혼자서 만들 수 없는 일
영화는 우리와 가까운 삶을 담고 있지만 제작 과정은 거리감이 있다. 촬영 현장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안고 한 넷플릭스 영화에 보조출연자로 참여했다.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영화 제목이나 촬영 내용 등 서술은 피했다.
안개가 유난히 짙던 지난 2일 새벽 5시 춘천 송암스포츠타운 봄내영화촬영소. 약속장소에서 어정쩡하게 있으니 누군가 다가왔다. “식사하고 옷 갈아입고 분장까지 다 받으신 후에 대기하시면 돼요”. 보조출연자를 인솔하는 ‘팀장’의 말에 움직이는 이들을 따라가니 ‘밥차’ 앞에 커다란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새벽이라 밥이 넘어갈까 싶었지만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몰라 줄을 섰다.
배를 채우고 있으니 버스 7대 정도가 왔다. 서울에서 온 보조출연자들이었다. 대략 150명쯤 돼 보였다. 이들과 ‘분장실’이라고 써붙인 천막 앞에 줄을 섰다. 천막 안에는 탁자 세 개가 있었다. 들어가니 분장팀이 다가와 머리를 만져줬다. 시대적 배경에 맞춰 머리를 묶고 왁스를 뿌려 머리 모양을 잡았다. 한 사람당 3~10분쯤 걸렸다.
오전 7시께, 깜깜했던 하늘이 밝아질 무렵 여자와 남자를 구분해 줄을 섰다. 의상팀이 갖고 있는 수백 벌 옷 사이에서 하루 종일 입게 될 옷을 건네받았다. 출연자의 체형과 나이대에 따라 옷과 신발을 골라줬다. 이때 알았다. 오늘 촬영될 영화가 여름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건네받은 옷은 시스루 원피스였다. 천막에 들어가 입어봤지만 시스루를 입을 준비가 되지 않은 터라 도저히 입을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 두 번째 옷을 받았다. 알 수 없는 무늬가 들어간 반팔 셔츠, 겨자색 7부 바지를 입고 노란빛이 감도는 5㎝ 정도 굽이 달린 구두까지 신었다. 긴팔 내복 소매를 접어 셔츠 안에 입고 외투까지 걸쳤건만 찬바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촬영장소로 이동할 무렵인 오전 8시, 늦잠을 막기 위해 설정해 둔 스마트폰 알람이 무음 설정을 뚫고 우렁찬 소리를 냈다. 한 팀장이 ‘촬영 중에도 켜놓을 건 아니지요?’물었다. 미안한 마음에 급하게 알람을 끄고 촬영장에 들어서니 소품팀에서 가방, 소품 등을 건넸다. 안내에 따라 자리가 배치됐고 소품팀이 돌아다니며 출연자에게 모자, 안경을 씌우고 상태를 확인했다. 촬영이 되기 직전 출연자들은 입고 있던 외투와 마스크를 벗어 카메라에 나오지 않는 곳에 모아뒀다.
촬영이 시작됐다. 메가폰을 통해 울리는 ‘슛, 레디, 액션’의 소리에 맞춰 출연자들은 지시 받은 연기를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 장면을 수차례 찍는다’는 소문대로 계속해서 비슷한 장면을 촬영했다. 문제는 추위였다. 추위에 다들 표정이 얼어있어 제작진이 밝게 웃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안개를 뚫고 해가 구름 사이로 뜨던 오전 11시38분까지 덜덜 떨었다. 경험이 많은 이들은 간식을 챙겨왔는가 하면 간이의자를 갖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수 차례 촬영하고 나니 스태프들이 눈에 띄었다.'슛’소리가 나면 인솔 팀장들, 출연자들의 머리나 옷을 계속 확인하는 의상·분장팀이 화면에서 사라지기 위해 뛰어다녔다.
오전 촬영이 끝난 후 1시간이 채 안 되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1시30분 촬영이 재개됐다. 지친 이들은 짬이 생기면 계단이든 콘크리트 바닥이든 상관없이 앉고 싶어했다. 나 역시 불편한 구두를 계속 신고 서 있던 터라 어디든 앉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앉아 촬영 중간 다른 출연자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10대부터 70대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다. 배우 지망생이거나 시나리오에 관심 있는 사람들, 퇴직 후 무료함을 달래고자 참여한 이도 있었다.
이날 만난 최준우(16·춘천) 군은 “친구들은 힘들다며 한 번 하면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하는데 수 차례 하고 있다. 용돈벌이로 시작했지만 흔치 않은 경험이라 재미있다”고 했고, 류주영(53·인천)씨는 “이번이 두 번째다. 주부인 내가 더 일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번 촬영에는 나이든 분도 많아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어간다”고 말했다.
보조출연이 처음인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보조출연으로 춘천에 대여섯 번째 방문한다는 이들도 있었고 지난 2년6개월 동안 100여편에 출연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주로 네이버 밴드 등을 활용해 정보를 얻고, 서울 신사역 혹은 여의도역 등에서 버스를 타고 온단다. 생계를 위해 보조출연 일을 하고 있다는 사람도 많았다. 5월부터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했다는 40대 여성, 코로나19로 해외에서 하던 사업을 하지 못해 일에 뛰어든 50대 남성도 있었다.
보조출연 경험이 많은 이에게 오늘 촬영 강도가 어떤지 물었다. 5점 중 4점 정도 된다고 했다. 날씨가 추워 힘들었지만 겨울 산골에서 사극 출연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어제는 시체 역을 맡았는데 누군가 죽창으로 찍어도 찍 소리를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촬영은 오후 6시께 다 함께 박수를 치며 마무리됐다. 줄을 서 차례대로 소품을 반납하고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은 후 의상을 반납했다. 팀장에게 개인정보를 담은 ‘일지’를 건넸다. 아직 입금이 되지는 않았지만 10여만원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이제껏 영화 속 보조출연자들까지 꼼꼼히 신경쓰지는 않았다. 보조출연자에 대해 영화의 큰 메시지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으로만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없다면 영화는 완성되지 않겠지. 무슨 일이든 그렇지 않겠느냐만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은 혼자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촬영소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