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한테도 안식년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쉼 없이 달려온 것 같기도 하고 어릴 적 동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그 시절 저처럼 그냥 관객의 입장이 돼서 축제를 즐기고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게 제 성격상 될는지 모르겠어요(웃음).”
2012년 5월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마이미스트(Mimist) 유진규가 한 마지막 답변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게 마지막 질문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러구러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그에게 다시 한번 인터뷰 요청을 넣었다. 당시는 '마임 데뷔 40주년', 이번엔 '마임 인생 50년'이 인터뷰를 위한 구실이었다.
춘천마임축제 그만둔 건 후회, 끝까지 싸우는 길 선택했어야
문화공간 '빨' 올인했는데 운영에 한계 결국 2년만에 문 닫아
후배에게 기회 달라 부탁, 조건 가리지 않고 오롯이 공연 집중
대표작 '빈손'…누구도 안 간 길을 가야 한다는 게 나의 화두
“내일은 백기완 선생 발인을 앞두고 열리는 추모문화제 때문에 서울 가야 해서 춘천에 없어요.”
지난달 17일, 내일(18일) 만날 수 있냐고 전화를 했더니 공연 스케줄이 있어 힘들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분명 공연 비수기라 아무 때나 좋다고 하더니…, 아무튼 여전히 바쁜 그다. “그럼 오늘 어떠세요.” 연락된 김에 그날 저녁이나 하자고 말하고는 그가 자주 가는 '봉의산 가는 길'에서 만나자고 했다. 올해 고희(古稀)를 맞은 그다. '호구조사'보다는 나와 했던 10년 전 인터뷰 그 이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당시 춘천마임축제 예술감독이던 그는 인터뷰 1년 후, 인터뷰가 무슨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강제 '안식년'을 갖는다. 말 그대로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쉬고 싶은데 못 쉬니까 사달이 난 거죠(웃음). 그때(2012년 인터뷰 당시) 한 1~2년 쉬고 돌아왔다면 새롭게 뛸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을 텐데 계속해서 붙잡고 있으니까 문제가 터진 거죠. 내 모든 걸 걸고 춘천마임축제를 25년 동안 전념을 다해 진행했었는데 타의에 의한 단절이 오니까 일종의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할까요. 충격은 한 3년 간 것 같아요.”
2013년 춘천마임축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직을 내려놓는다. 당시 춘천시는 이른바 다른 축제와의 형평을 이유로 마임축제에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운영위원회를 확대하고 시민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과정에서 순수 예술축제를 주장하던 이들은 축제를 하나둘 떠나갔다. 급기야 '오키드레드' 사건(박정희 대통령 생가에서 육영수 여사 실물 크기 사진 앞에서 '손가락 욕'을 보여 논란을 빚은 여성 팝 아티스트 행위예술가 사건)까지 터지게 된다.
“춘천시가 공문으로 이런 출연자는 부적절하니 공연을 취소하라는 통보를 보냈어요. 하지만 예술감독 입장에서 출연 정지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예정된 출연자를 공연무대에 못 세우는 순간 마임축제의 생명은 끝난다고 생각한 거죠. 운영위원회도 공연 취소를 결정했지만 예술가적 양심에서 난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공연을 강행한 그는 여러 소문, 내부 갈등 등에 염증을 느끼고 결국 사퇴를 결정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는 남는다고 했다. 그 결정이 섣불렀다고 생각하냐 물었다.
“섣불렀어요. 섣불렀어…. 지금 돌이켜보면 춘천마임축제가 내 축제가 아니었잖아요. 내 개인의 일이었다면 당연히 할 수 있는 행동일 수 있지만 마임축제를 함께해 온 수많은 사람, 그 사람들과 충분히 상의도 하고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물론 (출연자 문제는) 여전히 타협할 문제는 아니죠. 마임축제를 그만두는 선택이 아니라 끝까지 남아서 싸우는 길을 선택했어야 했어요. 그게 후회라면 후회죠.”
그리고 그는 중국과 네팔로 떠난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강원대 후문에 문화공간 '빨'의 문을 연다. 그가 던진 승부수였다. 매주 다양한 퍼포먼스와 공연이 이어지는 춘천의 문화 명소로 자리를 잡았지만 계속 운영하는 데에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결국 2년 만에 문을 닫는다. 또 다른 그의 결정. 가족들의 희생은 늘 함께 따라다녔다.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내 가족들도 내 상태를 아니까. 무엇이든 올인했다는 걸…. 그나마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걸 '빨'에 쏟아부은 거죠. 그런데 결국은 다 날렸으니까. 그런데 음…. 우리 집사람, 우리 아들 딸에게 또 한번 뭔가 실망이라고 할까, 그런걸 준 거예요.”
춘천마임축제를 떠나고 곧이어 문을 연 빨까지 정리한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대안이 될 것으로 생각한 빨까지 정리하게 됐으니…, 결국 내 오판이었던 거죠. 나는 앞으로 무얼 하면서 살아가야 하나 사실 막막했죠. 그때는 어디 취직을 해야하나 별 생각을 다 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까 공연밖에 없더라고요. 이전까지는 공연에 몰두한 게 아니고 일에 몰두한거니까 다 털고 공연자, 배우 유진규로 돌아가자 생각한거죠.”
유진규는 공연계에 있는 후배에게 공연을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기회를 달라고 부탁을 한다. 공연 조건 등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연을 시작하게 되지만 시작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연락이 온 게 진주 골목 페스티벌이었어요. 근데 조금 언짢았죠. 나는 거리공연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극장공연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제안을 거절했어요. 건방졌던 거지. 어느샌가 나는 거리공연은 하면 안되는 걸로 선을 긋고 있었던 거예요.” 이내 후회가 밀려왔다고 한다. 배우가 관객이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극장에서만 공연하면 반쪽배우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다음 날 바로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야, 아직 접수하냐?” 다행히 후배는 아직 시간이 있다고 했고 그는 오롯이 공연자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의 현장,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거리공연, 거리 퍼포먼스를 이어 갔다. 최근에는 다른 예술가들과 '중도문화연대'를 결성하고 중도 레고랜드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도 선사유적은 피에 관한 이야기, 핏줄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는 겁니다. 이건 끝까지 가야 하는 거죠. 왜냐면 뿌리에 관한 얘기니까 그냥 묻어 버릴 수 없는 거지. 예술가인 나로서는 그것을 찬성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자신의 대표작을 '빈손'이라고 한 그. 그 이유 때문인지 돈을 못 벌고 있다고, 그래서 '번 손'으로 바꿔야 한다고 흰 소리를 하고 있는 그에게 앞으로 10년 뒤 마임 인생 60년 인터뷰 때는 무슨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 물었다.
“후… 그럼 내 나이 80인데…. 내가 가면 그게 길이지 뭐가 있겠어요. 내 화두랄까. 누구도 안 간 길을 가야한다는 거거든요. 치열함은 빠져나가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탄다고 할까요. 이런 거를 언제든 어디서든 가리지 않고 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이러겠죠. 이제 갈 일만 남았네. 하하하하.”
오석기 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