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원주에서 일가족 3명의 사망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 7일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한데 이어 14세 아들의 몸에는 흉기로 인한 상처와 화상 흔적이 남아있었고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은 아파트 1층 화단으로 떨어진 채 숨진 사건이었습니다. 가정불화, 또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자살로 추정되던 이 안타까운 사건은 경찰 조사가 끝나기도 전인 지난 11일, 갑자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날 오후 80만명이 넘는 회원수를 가진 모 인터넷 카페에는 ‘나 당직때 있었던 사건이네…’라는 제목으로 당시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글이 게재되면서 부터입니다.
글에는 현장의 정황을 꽤 구체적으로 표현한데다 특수한 가족관계에 살인 전과 등처럼 수사관계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다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빠르게 전파됐습니다. 한 언론은 ‘단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여기에 올라온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 내용이 사실인지, 글을 올린 인물이 경찰인지 여부였습니다. 저를 비롯한 기자들은 곧바로 강원지방경찰청에 사실관계 요청을 했지만 경찰들은 하나같이 “조사를 더 해봐야 한다”며 함구했습니다. 20년 가까이 기자생활을 해 온 ‘짬’으로는 볼때 이런 상황은 100% 사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 게재자가 경찰이 아니고 내용도 거짓이었다면 경찰에서는 곧바로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곧바로 강원일보 인터넷에 ‘원주 일가족 사망사건 수사내용 사전 유출 논란’이라는 기사를 올렸고 이어 후속취재를 통해 현역 경찰관이 글을 올린 것이 드러나 경찰에서는 ‘공무상 비밀누설죄’를 적용해 사법처리하고 자체 징계를 하기로 했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저희가 속보로 게재했던 ‘원주 일가족 사망사건 수사내용 사전 유출 논란’과 ‘원주 일가족 사망사건 수사내용 유출은 현직 경찰관’이라는 기사에 남겨진 댓글에는 경찰관의 정보 유출사실에 대한 비난과 이를 막지 못한 경찰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 알게 해 준 것은 잘한 일”이며, “(글을 올린 경찰관에게)상을 줘야 한다”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또 “이젠 남녀가 만나면 건강진단서와 범죄이력부터 꼭 확인해야 한다”,“흉악범을 풀어놓으려면 2차 희생자가 생기지 않게 최소한 구분할 수 있도록 표시는 했어야 했다”, “가해자 인권 좀 그만 지켜줘라”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상당수 독자들은 ‘피의사실공표죄’나 ‘공무상비밀누설죄’보다 ‘알권리를 통한 다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정보의 필요성’에 손을 들어 준 것입니다.
특히,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영국의 ‘클레어 법’을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댓글에 달려 눈길을 끌었습니다. ‘클레어 법’은 영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가정폭력 정보공개 청구제도입니다. 2009년 클레어우드라는 여성이 전 남자친구인 조지애플턴에게 살해당한 사건 이후 만들어진 법입니다. 영국에서는 2014년부터 잠재적 피해자인 개인이 배우자(파트너)의 가정폭력 또는 폭력 전과 여부를 경찰에 확인 요청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이나 이웃, 친구 등 제3자와 기관도 요구할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경찰은 아직 공식적으로 원주 일가족 사망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카페에 올린 글이 정확한 사실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사건 자체가 안타까운 비극으로,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뒤이어 발생한 수사내용 유출 사건은 가정폭력에 대한 우리나라 사법제도의 개선 여부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기자보다 많은 독자들의 생각이 훨씬 유연하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경찰의 수사내용 사전 유출’이 문제라고 봤지만, ‘특수한 상황에 대한 정보공개’와 영국의 ‘클레어 법’까지 거론한 독자들의 댓글만큼 깊이 고민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를 뒤돌아보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무헌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