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향교는 고려 충선왕 5년 강릉존무사 김승인이 현재의 위치인 화부산에 창건했고, 이후 화재로 소실돼 조선 태종 13년 판관 이맹상에 의해 중건됐다. 역사가 있는 매우 오래된 건물로 가장 잘 정제된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형식으로 전국에 산재해 있는 향교의 규범이 되기도 한다. 6·25전쟁 때에도 건물이 불타지 않아 옛 규모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명실상부 전국의 향교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릉향교 대성전은 보물 제214호로 국가문화재, 명륜당을 비롯한 여타 부속물들은 도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돼 무려 반세기 이상을 하나는 국가문화재로, 다른 하나는 지방문화재로 구분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기에 강릉향교 명륜당의 보물 지정 당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강릉향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국 지방향교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른 건축물의 위치와 규모, 기법, 공간구조의 비례와 적합성, 단청과 채색의 조형성, 유서 깊은 역사성 등에서 향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표성과 역사성, 조형성은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한 전랑, 동·서무, 동·서재 등 모든 부속건물과 일체가 돼 서로 융합됨으로써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 건물 간의 조화성은 중건과 중수에 참여한 장인들이 시대를 서로 달리 살아왔음에도 전통을 유지했다는 것은 기문에 참여한 장인들의 이름을 표기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장인을 대우해 줌으로써 이들의 정신과 기술이 건축 조형성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 건물은 극도의 검약을 강조해 장식을 배제했고, 이러한 현상은 단청에서도 그대로 적용돼 선비의 고고한 기상을 나타내고자 했다. 또한 지형적으로 경사지에 석축을 쌓고 전체 영역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전랑 앞부분의 경사를 살려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게 함으로써 심리적 압박감을 완화했다. 여기에 건물 정면 중앙 칸에 '明倫堂(명륜당)'이라는 음각된 현판은 확인 결과 '주희(朱熹)'의 글씨로 밝혀져 서울 문묘 명륜당보다 400여년 정도 앞선 시대의 글씨다.
따라서 기존의 국가문화재인 대성전을 필두로 명륜당을 비롯한 동·서무, 전랑, 동·서재 건물이 강릉향교라고 하는 하나의 영역 내에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기에 하나로 묶어 국가문화재로 승급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